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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대왕은 병사인가? 독살인가?

zzixxa 2008.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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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이 정조대왕의 죽음을 끝으로 계획하여 드라마를 만들고 있는데 정조대왕의 죽음을 병사로 할 것인지 승정원일기에 비친 대로 정순왕후에 의한 독살로 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하다가 병사로 가닥을 잡은 모양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정순왕후는 개과천선하여 착하게 살았다는 이야긴데 순조가 즉위한 후 섭정을 한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네요.

 

이것저것 참고할 건 많이 있지만 조선왕조실록만 참고하여 정조대왕의 병증이 나타난 때부터 승하할 때까지 베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병사인지 타살인지 되짚어 보고싶긴 하지만 재주가 미천하여 결론은 이 글을 읽는 분 스스로가 생각가는데로 내려 주세요. ^ ^; 


일단 실록부터.....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12일(계해)

공조 판서 이만수를 통어사에 제수하여 징계하다 
대신 이하 신하들을 편전으로 불러 김이재의 일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밝히다 
이만수를 통어사에 좌천시킨 명을 거두어 달라는 승지 이노춘의 청을 거절하다 
이만수를 통어사에 좌천시킨 명을 거두어 달라는 좌의정 심환지의 청을 거절하다 
이의필·민태혁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조대왕의 병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봐서 이날까지는 그다지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 합니다. 그런데 하루를 건너 뛴 그 다음 다음날 병증에 대해서 나오기 시작하더니 집중적으로 튀어 나오기 시작합니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14일(을축)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편전으로 불러 진찰을 받다  
상이 이달 초열흘 전부터 종기가 나 붙이는 약을 계속 올렸으나 여러 날이 지나도 효과가 없으므로(중략)

상이 이르기를, “등쪽에 또 종기 비슷한 것이 났는데 지금 거의 수십 일이 되었다.

그리고 옷이 닿는 곳이므로 삼독[麻毒]이 상당히 있을 것이다.” 하였다. (후략)
가감소요산을 지어 올리다 
내의원 제조 서용보를 교체시키다
 

이 내용으로 봐서 종기가 나기 시작한지 수십 일이 지났습니다. 대략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왕의 종기를 수십 일씩이나 고치지 못한 탓에 서용보가 체직된 듯 하지만 속 뜻은 모를 일입니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15일(병인)
약원의 제신을 불러 접견하고 행인고를 지어 올리라고 명하다 
백호탕 두 첩을 올리다 
내의원이 입직하여 수시로 진찰하고 약을 논의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다
 
내의원이 아뢰기를,
“입시한 의관이 전하는 말을 삼가 들으니 석양에 등쪽의 열기가 더 오르는 증세가 있다 하므로 참으로 애타는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이미 날이 저물어 신들을 불러 접견하시라고 감히 청할 수 없으나 이러한 때 몸을 보호하는 조처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니, 빨리 신들로 하여금 의관을 거느리고 본원(本院)에 입직하여 수시로 진찰하고 약을 논의할 수 있도록 허락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내일 불러 접견하겠다.”
하였다.

가만 생각해봅니다.
분명 정조대왕은 병증이 빨리 고쳐지지 않음을 탓했었는데 내의원이 입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일까요?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16일(정묘)
약원의 제신과 대신 및 각신을 접견하고 심회를 말하다 
사순청량음과 우황고를 만들어 올리다 
내약원의 진찰을 거부하다 
내약원(內藥院)이 진찰을 받도록 두 번을 아뢰어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을 내렸다.
이병정을 내의원 제조로 삼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17일(무진) 
가감소요산(加減逍遙散) 세 첩을 지어 들여오고 금련차(金連茶) 한 첩을 다려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다려 오라고 명하였다???
이것은 정조대왕이 내의원의 처방을 믿지 못하고 스스로 처방을 했다는 얘기가 됩니다. 정조대왕은 무슨 까닭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일까요? 이것은 다들 짐작하겠지만 그때까지도 남아있는 반대세력의 시해 우려를 항상 신경쓰고 있다는 것이고 자신의 병증 또한 반대세력에서 연류되어 있음을 의심한 탓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정조대왕은 잠시 동안 내의원의 진찰을 거부하다가 자신의 의술로서는 한계가 있음을 알고 마지못해 진찰을 한 것 같습니다. 알려진대로 보면 정조대왕은 의술에도 상당히 능했지만 내의원의 의원보다는 조금 알겠죠?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18일(기사)
진찰을 받으라는 약원의 청을 물리치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19일(경오)
직숙을 간청하는 약원의 청을 받아 들이지 않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20일(신미)
약원의 제신을 불러 접견하다 
유분탁리산과 삼인전라고 및 메밀밥을 지어 들여오라고 명하다
 

이후의 일들은 그냥 제목만 보면서 넘어가겠습니다.
제목이랑 본 내용이랑 큰 차이가 없어서요... ^ ^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21일(임신)

약원의 제신과 대신·각신을 접견하고 진찰을 받다 
유분탁리산 등을 들여오도록 명하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22일(계유)
약원의 제신을 접견한 뒤 진찰을 받고 처방을 의논하도록 하다 
패모고를 조제해 들여올 것을 명하다 
향유조중탕과 향귤음을 조제해 들여올 것을 명하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23일(갑술)
약원의 제신을 접견하고 의술에 밝은 자를 두루 찾아보도록 지시하다 
약원의 제신을 접견하고 호남 수령들에 대한 포폄의 장계를 보겠다고 하다 
내의원 제조 이병정을 교체하고 김재환을 그 후임으로 삼다 
찹쌀밥과 우렁이 고약을 조제해 들여올 것을 명하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24일(을해)
약원 제신을 접견하고 병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다 
심연이 조제한 약들을 시험해 보고자 들여보낼 것을 명하다 
약원 제신을 접견하고 병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성전고와 연훈방을 조제해 들여올 것을 명하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25일(병자)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고 밤 사이 병에 차도가 있었음을 이야기하다 
약원 제신을 접견하고 병세를 의논하다 
고름이 나온 후의 처치에 대해 의논하다 
약원 제신을 접견하고 병의 증세를 이야기하다 
용뇌안신환과 우황청심원을 들여올 것을 명하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26일(정축)
약원 제신을 불러 접견하고 심연.정윤교에게 약을 붙일 것을 명하다 
약원 제신들이 원기를 보충할 탕약을 권했으나 임금은 유보시키다 
약원 제신을 접견한 뒤 경옥고를 들다 
약원 제신들이 팔물탕을 올리겠다고 아뢰다 
성전고와 연훈방을 조제해 들여올 것을 명하다 
경옥고를 들여보내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27일(무인)
정신이 혼미한 증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탕약을 올리다 
가미팔물탕 한 첩을 달여 들여올 것을 명하다 
약원 제신을 접견하고 탕약을 마신 뒤 처방을 의논하다 
약원 제신들을 접견하고 팔물탕을 들다 
약원 제신들과 연훈방을 다시 쓰는 문제를 논의하다 
인삼 5돈쭝과 좁쌀 미음을 끓여 들여올 것을 명하다 
약원 제신들이 수소문한 지방의 의관들을 대령하게 하다 
인삼 5돈쭝과 좁쌀 미음을 올리다 
약원 제신을 접견하고 인삼 1냥쭝과 좁쌀 미음을 들여올 것을 명하다 

정조 24년 경신(1800) 6월 28일(기묘)
 약원 제신을 접견한 자리에서 의관들이 진맥하다 
 가감내탁산 한 첩을 달여 들여올 것을 명하다 
 약원 제신을 접견하고 강최현이 지은 탕약을 들다 
 승지 한치응을 체직하고 김조순을 그 후임으로 삼다 
 영춘헌에 거둥하여 좌부승지 김조순 등을 접견하다 병세가 위중해지다 
 도제조 이시수가 좌부승지 김조순을 시켜 탑교를 써 보내다 
 왕대비의 분부에 따라 성향정기산 등을 올렸으나 회복하지 못하다  
 좌의정 심환지 등이 앞으로 나가 큰소리로 신들이 대령하였다고 아뢰었으나 상이 대답이 없자,

인삼차와 청심원·소합원을 계속 올려드렸다.


왕대비전이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분부하기를,

“이번 주상의 병세는 선조(先朝) 병술년의 증세와 비슷하오. 그 당시 드셨던 탕약을 자세히 상고하여 써야 할 일이나 그때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복용하고 효과를 보았으니 의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올려드리게 하시오.” 하자, 도제조 이시수가 명길로 하여금 성향정기산을 의논하여 정하게 하였다.


혜경궁(惠慶宮)이 승전색을 통해 분부하기를,
“동궁이 방금 소리쳐 울면서 나아가 안부를 묻고 싶어하므로 지금 함께 나아가려 하니 제신은 잠시 물러나 기다리도록 하시오.” 하므로 환지 등이 물러가 문 밖에서 기다렸다.


조금 뒤에 환지 등이 문 밖 가까이 다가가 큰소리로 신들이 이제 들어가겠다고 이뢰었다.
자궁(慈宮)이 대내로 들어가자 환지 등이 다시 들어왔다. 부제조 조윤대(曺允大)가 성향정기산을 받들고 들어오자 시수가 받들어 올리면서 숟가락으로 탕약을 떠 두세 숟갈을 입안에 넣었는데 넘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토해내기도 하였다.

다시 또 인삼차와 청심원을 계속 올려드렸으나 상은 마시지 못했다.
시수가 또 명길에게 진맥하게 하였는데 명길이 진맥을 한 뒤에 물러나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로 보아 이미 가망이 없습니다.” 하자, 제신이 모두 어찌할 줄 모르며 둘러앉아 소리쳐 울었다.

결국 정조대왕은 힘없이 승하하고 맙니다.

그런데 마지막 처방은 왕대비전, 즉 정순왕후가 분부한 성향정기산입니다. 물론 저는 이 약의 효능을 모릅니다.

하지만 정순왕후는 본인이 원하는 처방을 내릴 수 있는 권력이 있었고 이 권력은 다른 약을 내릴 수 있는 권력과도 일맥상통한다는 것이 주지할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정조대왕의 종기와 효종대왕의 종기가 두 왕을 죽음으로 이르게 했다는 것과 두 왕 모두 독살설에 휘말리고 있다는 말로 조선왕조실록 베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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