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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내 생전에 다시 안올 것 같아서 그래

zzixxa 2008.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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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은 시골 부모님 집에서 김장을 담그는 날이었습니다.

토요일 저녁 밤 길을 달려 시골집에 도착한 후 아침 일찍부터 김장준비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겨울비는 내리고 날씨는 싸늘했지만 여동생 가족과 모여서 김장을 담그는 일은 추운 날씨를 충분히 녹여줬습니다.

 

김장을 마치고 점심식사가 끝난 후 여동생 가족과 내 가족은 집으로 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섬주섬 김장김치를 차에 실고 아이들 옷을 챙기고......

그 틈에도 오랫만에 만난 아이들은 이 방 저 방을 뛰어다니며 장난질에 여념이 없습니다.


준비를 마치고 잠시 앉아있는데 할머니가 오셔서 내일 가라고 그러십니다.

(저에게는 구십이 넘은 할머니가 계십니다.)

시골집에 갔다가 올 때마다 듣는 얘기인지라 웃으면서


"내일 회사가야돼요.. 금방 또 올께요." 라고 말씀을 드렸죠.
할머니는 제 말을 들으시고 " 콩 때문에 그러냐?" 하고 물으십니다.

 

"콩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돼서 되묻자 할머니가 콩이 어쩌고....

하시면서 길게 말씀을 늘어놓으십니다.

 

"아니예요... 그런 게 아니예요.."
저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할머니께 아니라고 말을 합니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면서 할머니가 골라놓은 콩을 죄다 섞은 모양입니다.

그걸 보신 할머니가 아이들에게 콩을 다 섞었다고 야단을 치신 모양인데

그것 때문에 맘이 상해서 가는 줄로 생각을 하셨나 봅니다.

 

"다음 다음주 할머니 생신때 또 올께요..."
"그러지 말고 내일 가..."
"금방 다시 올께요."
할머니는 잠시 계시다가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가면 내 생전에 다시 안올 것 같아서 그래..."

순간 먹먹해집니다.

옆에 있던 아내도 같은 기분이 들었는지 아무말 없이 할머니를 보고만 있습니다.

 

할머니는 치매증상이 있으십니다.

그런 탓인지 어떤 날은 밤새도록 장롱에 있는 옷을 꺼냈다가 넣기를 반복하실 때도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심한 말을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 할머니가 하시는 말씀인지라 가슴이 아리고 답답해집니다.

 

"아녜요... 다음 다음주에 꼭 올께요."

밖에서는 여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돌아갈 준비를 거의 끝냈나봅니다.

 

"할머니가 내일 가라는데..."
여동생이 내말을 듣고 웃으며 말합니다.

 

"나는 아직까지 그런 말 한 번도 들은 적 없는데...오빠한테는 그런 말씀도 하시나봐."
"생전에 다시 못 볼 것 같으신댄다."

내 말을 들은 어머니가 뜻 밖인듯 말씀하십니다.

 

"진짜 돌아가실려나보다. 그런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는데..."

 

어머니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우리들이 와 있을 때에는 치매증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기하게도 그렇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없으면 치매증상이 심해지신다고 합니다.

 

여동생과 꼭 18개월 차이가 나는 탓에 어머니 젖보다는 할머니 젖을 물고 잠이 들 때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반응이 없는 할머니 젖에서는 진짜로 젖이 돌기 시작했고요......

 

어머니는 늘상 저에게 "너는 나보다는 할머니한테 더 잘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죠.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내에게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생신이 마지막 생신일 것 같아. 설날에 새배를 드렸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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