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정후겸 제대로 파헤쳐 보자 1
드라마 이산이 인기를 얻으면서 덩달아 정후겸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많아진 모양이다. 이곳에 들어온 분들의 키워드 1위가 정후겸이고 그 횟수가 무려 500회에 가까운 걸 보면......
좀 얍쌉하더라도 시대의 요구에 편승하는 것이 기회를 포착하는 자의 능력이라면 능력.
그렇다고 소설책을 보면서 파볼 수도 없고 그저 참고할 수 있는 건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 등 조선시대에 저술된 책들 뿐이다.
일단 정후겸에 대한 국조보감의 내용을 잠깐 보자. 국조보감 68권에 영조가 정조에게 선위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홍인한을 이야기 하면서 정후겸의 인물됨됨이를 말하고 있다.
국조보감은 조선 역대 국왕의 치적 중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실을 수록한 편년체의 역사책이니 국왕과 반대한 세력에 대해서 좋게 나올리는 없지만 실록과는 다른 방법의 기록이니 참고해서 해로울 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국조보감의 정조대왕 어제서문에 다음과 같이 보감에 대해서 설명해놓고 있다.
머리아프니까 쓸데 없는 말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정후겸의 시작은 이렇듯 홍봉한이 열어준다. 그래서 마지막도 같이 하지만 말이다. 정치달의 아내가 바로 화완옹주이니 정후겸으로서는 걷기도 전에 나는 기회를 얻은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정후겸은 영조 41년 양장에 합격하게 된다. 이로봐서 그 재능이 뛰어난 것은 확실하다.
영조 42년 5월 즉 정후겸이 18세이던 해 영조는 정후겸을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한다. 장원서 봉사가 종8품이고 홍문과 부교리가 종5품이니 급속승진이라고 말해야 되나? 하지만 12일 뒤 정후겸은 사헌부의 지평으로 임명된다. 사헌부 지평은 정5품. 하지만 정후겸이 아스팔트길 같은 탄탄대로만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영조 43년 1월의 실록을 살펴보자.
태묘에 술을 사용하는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때는 금주령이 선포된 때였던지라 사안이 민감했고 어찌보면 왕의 결정에 반박하는 모양새이기도 했다. 의지가 곧은 것인지 배경을 믿고 설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갑론을박 끝에 술을 사용했으니 결국은 왕의 뜻을 꺽은 일일수도 있겠다.
여기서 벼슬 이름을 한 번 보자. 술쓰기를 청할 때는 수찬이었으나 이번에는 부수찬이다. 출세가도에 슬~쩍 제동이 걸린 게 맞는 것 같다. 물론 화완옹주의 든든한 배경이 있으니 걸려봐야 얼마나 걸리겠느냐마는 정원 유지양이 제주를 다시 쓴 과정을 상소하면서 정후겸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다.
물론 영조에게 먹힐리가 없으니 유지양이 체직을 당했겠지만 이것은 정후겸의 출세가도에 당파간의 싸움이라는 걸림돌이 생겼다는 뜻이다. 물론 슬~쩍 걸리는 돌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돌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자갈 수준인가?
정후겸은 영조 43년 12월 문학으로 임명되고 정후겸의 나이 20세인 영조 44년 6월 승지로 임명된다. 20세의 승지라.... 승지도 나름대로 여러종류의 승지가 있으니 딱히 품계를 논할 일은 아니지만 승지가 된지 10일만에 다시 호조참의로 임명된다.
참의가 어떤 위치인가?
한번으로 끝내지 못하고 연재를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사실로만 토대를 해서 적어가려니 딱딱하고 재미없고 말도 싸래기를 먹었는지 짧게 하고... 맘에 안들면 더이상 보지마세요..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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