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인간 정후겸 제대로 파헤쳐 보자 4

zzixxa 2009.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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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조 52년 1월 10일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備局堂上)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이 정후겸(鄭厚謙)을 비국 당상으로 차출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급하구나.”
하매, 김상철이 말하기를,

묘모(廟謨)[각주:1]
를 연습하여 소조(小朝)[각주:2]를 섬기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영조가 말한 "급하구나"의 의미는 무엇일까?

노론의 정조탄핵 움직임에 대한 질책이었다고 생각하면 억측일까?

일단 접어두고 왕조실록에 있는 정후겸에 대한 평가를 한 번 보자.

 ● 영조 52년 2월 9일
임금이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친히 왕세손에게 어사 은인(御賜銀印)과 어제 유서(御製諭書)를 주었다. 왕세손이 고취(鼓吹)하며 배진(陪進)하여 배례(拜禮)하고 받으니, 매우 성대한 일이었다. 하교하기를,
“이 인(印)은 세손을 따라야 하는 것이니, 이 뒤로는 거동할 때에 이 인으로 전도(前導)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광달문(廣達門)에 앉아 은인(銀印)으로 안보(安寶)할 때에 배위(陪衛)하는 신하들이 모두 기뻐서 발을 구르며 춤추는데, 부총관(副摠管) 정후겸(鄭厚謙)만이 언짢은 빛이 뚜렷이 있었으니, 그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길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다. 아! 정후겸은 본디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각주:3] 같은 흉악한 자로서 늘 저궁(儲宮)을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홍인한(洪麟漢)과 체결하여 감히 위태롭게 하고 핍박할 생각을 일으키고, 심상운(沈翔雲)과 환출(幻出)하여 번복할 계책을 부렸다. 중신(重臣) 서명선(徐命善)의 상소는 종사(宗社)의 대계(大計)를 위한 것인데, 조태구(趙泰耉)·유봉휘(柳鳳輝)가 다시 나왔다는 말을 방자하게 입에 내고, 요사한 심상운을 잡아다 국문하던 날에는 수인(囚人) 남간(南間)의 말을 팔을 걷어 올리고 큰소리로 이야기하였다. 그 밖의 음모(陰謀)·역절(逆節)도 모두 지극히 흉악하여 부도(不道)한 역적인데, 아직도 배위하는 반열(班列)에 있어 태연히 금달(禁闥)에 출입하니, 생각하면 섬뜩하여 절로 마음이 싸늘하고 뼛골이 오싹해진다.

  
이건 정조실록이 아니고 영조실록이다. 슬슬 영조실록은 노론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몰고간다. 잘못보면 일성록을 보는 것 같은 이 글들은 점점 정조가 그 위치를 다잡아가고 노론의 권력에 균열이 생긴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된다. 영조실록을 하나만 더 보자.

 ● 영조 52년 2월 11일
문신 제술(文臣製述)의 고관(考官)에 홍인한(洪麟漢)을
의망(擬望)[각주:4]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아! 홍인한은 저궁(儲宮)의 폐부(肺腑)와 같은 친척으로서 대조(大朝)께 고굉(股肱)의 부탁을 받았는데 보답할 도리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켜 정후겸(鄭厚謙)과 체결하고 흉도(凶徒)를 불러 모아 이극(貳極)을 위태롭게 핍박하고 청정(聽政)을 저지하며 감히 세 가지는 반드시 알 것 없다는 말을 방자하게 연중(筵中)에서 아뢰고, 또 대청(代聽)을 명한 날에 성상이 근신(近臣)을 시켜 쓰게 하자 감히 손을 휘둘러 말렸으니, 그 발호(跋扈)하여 임금을 업신여기는 마음은 왕망(王莽)·조조(曹操)·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도 이보다 더할 수 없는데, 아직도 삼공(三公) 줄에 끼어 있어 관례에 따라 고관의 망(望)에 검의(檢擬)되었으므로 인심이 분개하고 공론이 더욱 격렬해졌다.”

  
이제 영조가 승하할 때가 다 되었다. 영조의 승하는 곧 정후겸의 몰락과 연관되는 것이다.
왕이 승하하는 날 정후겸은 어떤 행태를 보이는지 영조의 승하일인 영조52년 3월 3일의 실록을 보자.

 술시(戌時)에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상복(金相福)·제조(提調) 박상덕(朴相德)·부제조(副提調) 서유린(徐有隣)이 의관(醫官) 오도형(吳道炯)·정윤검(鄭允儉)·유광익(柳光翼)·서명위(徐命緯)를 거느리고 입시(入侍)하였다. 왕세손이 서유린에게 말하기를,
“저녁 뒤부터 가래와 어지러운 증후가 더욱 심하고 눈꺼풀이 열렸다 감겼다 하며 손발의 온도가 여느때와 다르시다. 강귤다(薑橘茶) 두어 술을 드시게 하여 보았더니 온기(溫氣)가 있는 듯하다가 곧 다시 차지셨으니, 애가 타서 어쩔 줄 모르겠다. 탕제(湯劑)는 달여서 대령하였는가?”
하매, 서유린이 말하기를,
“달여서 대령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오도형을 시켜 진찰하게 하였는데, 오도형이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가래가 막혀서 그럴 것입니다. 백비탕(百沸湯)을 먼저 드시고 계귤다(桂橘茶)에 곽향(藿香) 한 돈을 더하여 달여 드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왕세손이 임금을 부축하고 숟가락으로 백비탕을 떠서 드리니, 임금이 잠시 돌아누우려 하며 작은 옥음(玉音)에 떨리는 기가 있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다음(茶飮)이 왔는가?”
하매, 왕세손이 서유린에게 말하기를,
“다음을 빨리 달여 오라.”
하였다. 한참 있다가 임금이 돌아 움직이려는 뜻이 있으므로, 왕세손이 숟가락으로 다음을 떠서 드렸다. 두어 술에 이르러 혹 순하게 내려가기도 하고 토하여 내기도 하였는데, 왕세손이 박상덕을 시켜 한 첩을 다시 달여 오게 하였다.

왕세손이 임금을 부축하여 들게 하였는데, 임금이 가래침과 들었던 다음을 토하여 내니, 오도형이 말하기를,
“토하는 증세는 막힌 증세에 매우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또 가래침을 토하였는데, 왕세손이 박상덕을 시켜 계귤다를 달여 들여오게 하였다. 왕세손이 어수(御手)를 받들어 오도형을 시켜 자주 진찰하여 보게 하고, 울며 말하기를,
“어제 이전에는 이러한 때가 있기는 하였으나 조금 지나면 가래 증후가 조금 멈추셨는데, 오늘은 아직도 동정(動靜)이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는가?”
하고, 성체(聖體)를 주무르며 잠시도 옆을 떠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애태우니, 보는 신하들이 모두 느껴 울었다. 박상덕이 탕제를 달여 바쳤는데, 왕세손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오도형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이제는 손발이 차가운 것이 더욱 심하시니, 어찌하는가?”
하였다. 이때 임금이 잠든 듯하여 오래 가래 소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문 밖에 물러가 엎드렸다.

조금 뒤에 왕세손이 울며 김상복 등에게 말하여 진찰하게 하였는데, 오도형이 진후(診候)한 뒤에 물러가 엎드려 말하기를,
“맥도(脈度)가 이미 가망이 없어졌으니 이제는 달리 쓸 약이 없습니다. 한 냥중의 좁쌀 미음을 달여 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니, 왕세손이 달여 들여오게 하고, 또 하령하여 궁관(宮官)과 승지들과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을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서유린이 청하여
유문 표신(留門標信)[각주:5]을 냈다. 박상덕이 좁쌀 미음을 받들어 들어오니, 왕세손이 숟가락으로 떠서 드렸으나, 임금이 이미 들지 못하게 되었다. 왕세손이 울며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좁쌀 미음도 효험이 없으니, 이를 장차 어찌하는가?”
하고,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창성위(昌城尉) 황인점(黃仁點)·정후겸(鄭厚謙)·김효대(金孝大)·김한기(金漢耆)·김한로(金漢老) 등을 입시하게 하였다. 시임·원임인 대신이 입시하였다.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 등이 말하기를,
“성후(聖候)가 이러하시니, 애가 타서 못 견디겠습니다. 그러나 저하(邸下)께서 예후(睿候)를 돌보지 않고 이처럼 지나치게 마음졸이시면 신들은 더욱이 몹시 민망합니다.”
하니, 왕세손이 눈물을 흘리며 하령하기를,
“대신과 의관이 침내(寢內)에 들어가 성궁(聖躬)을 진찰하라.”
하매, 김상철 등과 오도형 등이 침호(寢戶) 안에 들어가 살폈다. 신하들이 말하기를,
“아주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종사(宗社)와 산천(山川)에 기도하는 일을 빨리 거행하라.”
하였다. 왕세손이 어수를 받들고 부복(俯伏)하여 슬피 울며 어탑(御榻)을 떠나지 않으니,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예정(睿情)이 어찌 그러하시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지금은 이러셔서는 안 됩니다. 바라건대 어탑에서 조금 떨어지소서.”
하였으나, 왕세손이 듣지 않고 부여잡고서 슬피 울기를 마지않았다. 서유린이 말하기를,
“궁성(宮城)의 호위(扈衛)를 지체할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왕세손이 소리내어 울며 답하지 않으니, 김상철이 나아가 말하기를,
“이런 황급한 때에 호위하는 일을 어찌 잠시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승지는 어찌하여 써서 아뢰지 않습니까?”
하고, 영지(令旨)로 궁성의 호위를 규례에 따라 거행할 것을 써서 반포하였다.

김상철이 어탑 앞에 나아가 유교(遺敎)를 쓸 것을 청하자, 도승지 서유린이 유교를 썼는데, 이르기를,
“전교(傳敎)한다. 대보(大寶)를 왕세손에게 전하라.”
하였다. 쓰기를 마치자, 김상철이 다시 어탑 앞에 나아가 유교를 선포할 것을 고하고 서유린을 시켜 침문(寢門) 밖에 서서 큰소리로 읽어 아뢰게 하였다. 김상철 등이
속광(屬纊)[각주:6]을 청하니, 왕세손이 울며 말하기를,
“아직 조금 기다리라.”
하였다. 이때 날이 밝기 전이었는데, 조금 뒤에 김상철 등이 또 속광을 청하니, 왕세손이 소리내어 슬피 울며 말하기를,
“그리하라.”
하고, 하령하기를,
“내전(內殿)에서 드실 좁쌀 미음을 대령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상철이 말하기를,
“속광할 때에는 집사(執事)가 같이 들어와야 합니다.”
하니, 하령하기를,
“금성위 박명원·창성위 황인점·공조 판서(工曹判書) 김한기·부사직(副司直) 정후겸·병조 참의(兵曹參議) 김한로로 하라.”
하였다. 도제조 김상복이 좁쌀 미음을 바쳤으나, 왕세손이 부복하여 소리 내어 울며 물리치고 들지 않았다. 세 제조와 여러 대신이 울며 아뢰기를,
“임금의 효도는 필서(匹庶)와 다릅니다. 종사(宗社)의 중한 부탁과 백성의 희망이 오직 저하 한 몸에 달려 있는데, 저하께서는 어찌하여 생각이 여기에 미치시지 않습니까?”
하였으나, 왕세손이 소리내어 울기를 마지않고 끝내 들지 않았다.

집사들이 어상(御床) 옆에 나아가 속광하였다. 속광이 끝나고 하번(下番)인 한림(翰林) 이심연(李心淵)이 ‘상대점(上大漸)’ 석 자를 써서 외정(外庭)에 두루 보이니, 바로 묘시(卯時) 초 3각(三刻)이었다. 조정(朝廷)에서 대전(大殿)·중궁전(中宮殿)에 정후(庭候)하였다. 왕세손이 울며 대신에게 유시하기를,
“열조(列朝)에서
예척(禮陟)[각주:7] 때에는 번번이 와내(臥內)에 계셨으므로 고복(皐復)[각주:8] 때에야 신하들이 비로소 입참(入參)하였는데, 이번에는 대점(大漸) 전부터 지금까지 경들이 입참하여 성덕(聖德)이 정종(正終)에 이르러 이처럼 뛰어나신 것을 우러러보았으나, 이제는 다시 우러러볼 데가 없어졌다.”
하고 소리내어 울기를 그치지 않으매, 김상철 등이 말하기를,
“아직 고복하지 않았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효(睿孝)를 조금 억제하고 예제(禮制)를 따르소서.”
하였다.
이때 대신과 여러 신하가 청사(廳事)에 서서 기다리는데, 정후겸이 집사로서 들어와 다리 병을 핑계하고 전정(殿庭)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감히 지팡이를 짚고서 표독한 빛이 낯에 나타나고 조금도 슬픈 모습이 없었으니, 그 마음을 캐어 보면 아! 또한 모질다.

   
정후겸이 모질었을까? 아니면 이제 끝나버릴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다음부터는 정후겸의 본격적인 몰락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1. 나라를 다스리는 방략(方略) [본문으로]
  2. 섭정(攝政)하는 왕세자 [본문으로]
  3. 왕망은 한(漢)나라 효원 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서 평제(平帝)를 죽이고 한조(漢朝)를 빼앗아 신(新)나라를 세운 자, 조조는 후한(後漢) 때의 권신(權臣)으로 아들 조비(曹丕)가 헌제(獻帝)를 폐위한 뒤 무제(武帝)라 추존하였음. 사마의는 삼국 시대(三國時代) 위(魏)나라의 장수로 문제(文帝) 때 승상의 자리에 올라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제위(帝位)를 찬탈할 기초를 닦은 자, 환온은 동진(東晉)의 정치가로서 벼슬이 대사마(大司馬)에 이르렀으며 황제(皇帝) 혁(奕)을 폐위하고 간문제(簡文帝)를 옹립한 후 찬탈의 음모를 꾸미다가 이루지 못하고 병사(病死)하였음. 네 사람 모두 왕위를 찬탈하거나 관계한 자임. [본문으로]
  4. 벼슬아치를 발탁할 때 공정한 인사 행정을 위하여 세 사람의 후보자를 임금에게 추천하던 일 [본문으로]
  5. 유문(留門)할 때에 사용하는 표신(標信). 유문은 성문(城門)·궐문(闕門) 등의 개폐(開閉)는 정시(定時)에 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꼭 나가야 할 사람과 들어올 사람이 있을 때는 그 개폐를 유보(留保)하던 일. 표신은 궁중에 급변(急變)을 전할 때나 궁궐문을 드나들 때에 표로 가지던 문표(門標)임. [본문으로]
  6. 임종(臨終) 때 솜을 코밑에 대어 숨이 지지 않았나 알아보는 일. 전(轉)하여 임종(臨終)을 달리 이르는 말. [본문으로]
  7. 승하(昇遐) [본문으로]
  8. 초혼(招魂) 사람이 죽었을 때에, 그 혼을 소리쳐 부르는 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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