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이 본 이순신 장군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990년~1998년 ...약 8년에 걸쳐서 중국학자5명과 일본학자7명 그리고 그외 일본사관학교 (육사.해사) 장교및 중국인민박물관장. 한국해군사관학교장교들의 도움으로 총 32권으로 발권된 책이죠.
이 책은 크게 이순신장군 생애를 다룬 5권.(이순신은 누구인가?)
이중에서 좀 특이한 것은 일본장수가 본 이순신장군에 관한책이 2권이나 된다는것인데 이순신장군께서 난중일기를 남기시듯 일본장수들도 나름대로 자신들의 기록을 남긴 서적들이 꽤 있습니다.
특히 이 두사람은 이순신장군에 대한 기록이 유별 나다고 합니다. 아마 같은 수군이라서 그랬겠지요.
1. 와키자카가 본 이순신
예전에 kbs1 역사스페셜에서도 나온적이 있읍니다.
와키자카는 2천의 군사로 약 5~10만명(정확한설은 없음. 우리역사에는 5~6만명이라고 하고 일본역사에는 8~10만이라고 함)정도 되는 조선육군을 물리친 명장중에 명장입니다.
그러한 명장이 듣지도 못한 장수 이순신장군에게 대패를 하였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을 겁니다. 한 예로 와키자카는 한산도대첩 이후로 충격에 6일을 굶었다고 본인이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으니 그 충격은 대단했었나 봅니다.식음을 전폐하고 내가 왜졌는지 생각하고 고민하는 이런 문장이 있읍니다.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다른 조선장수 정도였을거라 생각하였다.하지만 내가 겪은 그 한번의 이순신 그는 여느 조선의 장수와는 달랐다. 나는 그 두려움에 떨려 음식을 몇일 몇날을 먹을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하는 장수로써 나의 직무를 다할수 있을련지 의문이 갔다. 이후에도 와키자카는 여러번 이순신장군에대한 본인의 생각과 조선수군과 있었던 전투내용을 상세히 기록해 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흥미로운점은 와키자카가 쓴 내용을 보면....
적 장이지만 와키자카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지는 글이죠. 아마 이러한 이유 때문에 4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후손들이 이순신장군 탄생일 때 오는가 봅니다.
2. 명의 사신이 본 이순신
그리고 "운덕 " 이라는 명나라의 사신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후일 이순신장군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을 했습니다.
하루는 어두운밤 눈이 몹시 내리고 그바람이 칼날 같아서 살결을 찢는듯하니, 감히 밖으로 나서지 못하겠더라.
그러한데 그속을 통제사영감이 홀로 지나가니, 무슨까닭으로 이 어둡고 추운바람속으로 거닐고 있는걸까? 궁금하던차에 한번 따라가보니 통제사 영감이 가고 있던곳은 바로 왜놈이 잡혀있는 현장으로 가는거 아닌가.
더욱이 이상하여 더 밟아보니 통제사영감 손에는 한권의 책이 있더라. 밖에서 보니 통제사 영감은 그 왜군에게 명심보감중 효행편을 읽어주고 있는것이 아닌가.
다음날 알아보니 그 왜군의 나이는 15세이더라. 10살 의 어린나이에 병사가 되어 왔음에 이 아이가 포로가 된후 이를 딱히 여긴 통제사영감이 별도로 감싸주었던 것이다. 10살에 포로가 되었으니 벌써 5년이 되었고 그동안 왜군의 아이는 조선말을 배웠으며 간간히 통제사 영감이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고한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전쟁이지만, 저 두사람을 보면 누가 어찌 서로를 원수라 하겠는가. 내가 본 저 두사람은 조선장수대 왜군이 아닌 한 아버지와 그의 아들로 보였으니.. 통제사염감이 저러하다면, 그의 백성을 아끼는 마음 무엇으로 나타낼수 있겠는가!
3. 명의 도독 진린이 본 이순신
명나라의 황제 신종(만력제)은 조선에서 진린도독으로부터 한통의 서신을 받는다.
황제폐하 이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 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臣)이 본 이순신은 그지략이 매우 튀어날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 지녀야할 품덕을 고르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명(明)국의 화근인 저 오랑케(훗날청國)를 견제할수 있을뿐 아니라, 저 오랑케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明)국으로 귀속시킬수 있을것이옵니다.
혹여 황제폐하께서 통제사 이순신의 장수됨을 걱정하신다면 신(臣)이 간청하옵건데 통제사 이순신은 전란이 일어나고 수년간 수십차례의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음에도 조선의 국왕은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며 또한 조정대신들 또한 이순신의 공적에 질투를 하여 수없이 이간질과 모함을 하였으며, 급기야는 통제사의 충의를 의심하여 결국에는 그를 조선수군통제사 지위를 빼앗아 백의종군에 임하게 하였나이다.
허나 통제사 이순신은 그러한 모함과 멸시에도 굴하지않고 국왕에게 충의 보였으니 이어찌 장수가 지녀야할 가장큰 덕목이라 하지 않을수 있겠나이까. 조선국왕은 원균에게 조선통제사 지위권을 주었으나 그 원균이 자만심으로 인하여 수백척에 달한 함대를 전멸케 하였고 단 10여척만이 남았으메 당황한 조선국왕은 이순신을 다시불러 조선수군통제사에게 봉했으나, 이순신은 단 한번의 불평없이 충의를 보여 10여척의 함대로 수백척의 왜선을 통쾌하게도 격파하였나이다.
허나 조선의 국왕과 조정대신들은 아직도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또다시 통제사 이순신을 업신여기고 있나이다. 만일 전란이 끝이난다면 통제사 이순신의 그목숨은 바로 풍전등화가 될것이 뻔하며, 조정대신들과 국왕은 반드시 통제사 이순신을 해하려고 할것입니다.
부디 통제사 이순신을 거두시어 저 북쪽의 오랑케(훗날의청국)를 견제케 하소서.
1990년 3월 하북에서 제1차 중.일 합동 연구회(이순신)를 가졌다.
이순신???
나의 놀라움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학자들은 임진왜란에 대해서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시각으로 보고있었다.
이순신. 참으로 읽으면 읽을수록 수수께끼 같은 인물.
5. 장웨이링 교수가 말하는 우리의 거북선
1997년 10월.
어쩌면 역사학자인 나도 이 거북선을 이순신 인물에대해서 연구하면서 처음 보았으니 학생들이 모른다고 답하는건 어쩌면 무리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학생들이 이 거북선을 자세히 볼수 있도록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볼 기회를 주고난후 나는 질문을 바꾸어서 왜 청나라가 망할수밖에 없었고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서 질수밖애 없었는지 질문을 던져보았다.
나는 잠시 창너머를 바라보았고, 한참동안이나 내가 강단의 창너머만 바라보자 이에 이상했는지 학생들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나는 이에 만일 지금 또다시 지금 중국이 청나라처럼 되었고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이 나타난다해도 결과는 마찬거지일거라고 답해주자 모두들 의아해했다. 그러자 한 학생이 손을들며 그렇다면 교수님께서는 어떤 위인 나와야 된다고 생각 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하였고 나는 그 질문에 거북선을 다시한번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것은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있는대로 배다. 지금부터 400년전에 만들어진 전투함. 이 전투함을 만든 이순신. 400년전에 조선과 일본의 전생시 조선을 구한 이순신장군이야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나는 여러분에 말한다. 주유는 훌륭한 지휘관이다. 그러나 주유는 이순신장군과는 격이 다르다. 주유는 양쯔강에서 활약한 장수지 진정한 해상지휘관은아니다. 영국을 보라. 네덜란드를보라 스페인을보라. 그들은 나라는 작아도 바다를 가졌기에 그리고 그바다를 점령하였기에 세계 최고의 국가로 일어설수 있었다. 그와 반대로 청나라는 거대한 대륙국가 이였지만 바다를 몰랐기에 무너지고 만것이다.
여기 거북선을 보라. 누가 이 배가 400년전에 만들어졌다고 믿겠는가?
라는 결과를 말해주자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세계 어느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한번 거북선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왜 이순신이 위대할 수 밖에 없는이유를 덧붙여 설명해주었다.
나는 그리고 나서도 1시간정도 더 이순신장군에 대한 삶과죽음에 대해서 이야기기를 해주고 강의를'끝마칠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강의가 끝났을때 난 처음으로 전 학생이 일어나며 기립박수를 받아 보았다. 어떤 학생은 눈물을 흘리기까지도 하면서.... 내가 처음 이순신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을때 그 감정을 나의 제자들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학자란 후세사람들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 역사학자란 두가지의 부끄러움이 있다. 한가지는 숨기는것이다. 히틀러가 200만 유태인을 죽인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려하는 역사학자들이 더 부끄러운것이다. 나의 조국의 부끄러움보다 역사앞에서 그 진실을 숨길때 그것이 참으로 부끄러운짓이다. 또 한가지의 부끄러움을 말한다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찾지못하는 역사학자들이 바로 그들이다. 진정한 위인은 자기가족만을 위해서 자신의 조국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아니다. 진전한 위인이란 모든 만인을 위하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위인이며 나는 그 위인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세계의 전쟁영웅은 피로만들어진다. 전쟁영웅은 만인들에게 우러러 보게끔 만든다. 알랙산더대왕도 그러했고 케사르도 그러했고,징키스칸도 그러했고,나폴레옹도 그러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게 한다. 우리자신을 부끄럽게 한다. 이러한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크리스챤인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있는 그분.... 이순신 장군을 볼때면 문득 그분이 떠오른다. 두분다 나의 고개를 숙이게 한다. 이순신 장군은 단순히 조선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피로 혁명을 일으키기보다는 바로 십자가를 선택하셨다. 모든것을 홀로 짊어지시고 가셨다. 2000년전의 한 청년이 그래햇듯이.... 이순신장군은 그 처절한 전쟁속에서 忠.孝.義.愛.善 을 가르키신 분이셧다. 그러고보니 한국사람들은 이순신장군을 영웅 이순신이라 말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성웅 이순신"
1996.4월 이케다 하야토 교수의 [아시아 역사를 바꾼 이순신] 중에서 14부인 (이순신의 혁명과 죽음) 중에서 .....
< 혁 명 과 죽 음 >
이순신의 혁명. 우리들은 왜 이순신은 혁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선택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어보았다. 수많은 전공에도 불구하고 조선조정으로부터의 의심과 질투를 받은 그는 단 한번 이라도 혁명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먼저, 우린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켰다면 과연 성공하였을까? 하는 부분부터 토론을 해보았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명나라의 군대였다. 명나라 군대 역시 이순신에 대한 반감이 컸으며, 명나라의 장수 유정은 바로 곧 명나라의 황제를 대신 하는것이기에 이순신에겐 유정을 넘어서야 1차적인 혁명을 이룩할 수 있을 것이며. 혁명후 명나라 황제의 질타를 과연 극복할수 있 느냐 하는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도 간단하였다. 조선의 왕 선조는 이순신이 혁명을 일으키자 바로 명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구원을 청했을 것이다. 명나라의 황제가 도와준다면 이순신의 군대는 두려워 하지 않아도 될것이라 생각했기에...
이 역시 답은 간단하였다. 그 당시 명나라의 국력은 임진왜란(정유)으로 인하여 국력이 크게 약하게 되었으며, 게다가 북으로의 오랑케(훗날 청)의 견제가 심해져 있었으니... 전란이 채 끝나기도전에 또한번 강력한 이순신군대와 전쟁을 한다는것은 불가능 한일 일었기 때문이다.
명나라의 문록(文錄) 중 조선으로 건너간 명나라 장수 진린이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글에 의하면.....
그런데..... 이순신이 혁명이 아닌 죽음을 선택한것이었다. 왜였을까?
그런데 이순신은 쿠테타도 혁명도 토사구팽도 모두 거절하였다. 이순신은 오직 죽음만을 선택 한것이었다. 이순신 과연 그는 모든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 내용에서는 명나라가 이순신장군을 끌어들여서 북의 오랑케(훗날 청나라)을 견제 시킬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단순히 이순신장군께서 혁명을 이룩하면 조선이 발전 되었을 거라고 단정을 내리곤 합니다. 물론 그럴수도 있었겠지만 국제정세란 매우 이해관계가 복잡한 일입니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어쩌면 그러한 모든것을 다 아셨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순신장군이 혁명을 일으키고 명나라가 이순신을 도와줘서 낭떨어지에 몰린 조선왕선조와 조정대신(이순신의 반대파세력)들이 뜻밖에도 일본과 손을 잡게되고 비밀협약을한다면 과연 조선은 어떻해 되었을까 하는?
혹시 이순신장군은 그러한 모든 과정까지도 생각하지않았을까요. 왜냐하면 이순신장군은 너무나도 치밀한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드라마를보고 흥분해서 가설을 내세우지만 이순신장군은 끝까지 냉정함을 잃지 않고 내가 무엇을 해야 되는가를 정확이 아셨던 분이십니다.
이순신 장군에대한 책이 총32권. 그것도 한국 학자가 아닌 일본과 중국학자들에 의해 저서가 된 책.
참고: 이순신 장군 가계
그의 가계는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그의 12대손이 된다. 그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5대조인 변(邊)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와 홍문관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거(#거21)는 병조참의에 이르렀다.
오래 전 글이라 출처를 모르겠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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