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운관
조선조의 천문학에서 특기할 것은 서운관의 정비와 그 직제의 특이성에 있다.
개국 후 한양으로 천도하고 왕궁이 완성되자, 경복궁 영추문(迎秋門) 안과 북부 광화방(廣化坊)의 두곳에 서운관을 설치하고 천문·지리·역수·점주(占籌)·측후·각루 등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서운관은 뒤에 세조(世祖)때(1455∼1468)에 관상감(觀象監)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으나 조선초에 설치하였던 관상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거의 완전히 회진(灰盡)되어버리고 그 일부는 선조 때부터 조금씩 창덕궁내에 복구되었으며, 숙종 때에 이르러서 영감사(領監事) 남구만(南九萬)이 현지를 답사하여 창덕궁 금호문(金虎門) 밖에 다시 옛 관상감을 복구시켰다.
여기에는 청사(廳事)·관천대(觀天臺)·흠경각(欽敬閣)·일구대(日晷臺)·측우대(測雨臺)·천문직려(天文直慮)·삼력청(三曆廳)·취길청(趣吉廳)·일과청(日課廳)·관청(官廳)·인력소(印曆所)·인출소(印出所)·이청(吏廳)·문랑(門廊)이 있었다. 이밖에 경희궁의 개양문(開陽門) 밖에도 관상감을 설치하였다. 경복궁내에 있던 국초의 관상감의 유물들은 고종 때 대원군(大院君)이 경복궁을 재건하면서 영추문 밖의 매동국민학교(梅洞國民學校) 자리로 옮겨놓았다고 한다.
(2) 관상감
서운관의 직제로는 고려의 구제를 따라 판사 2인, 정(正) 1인, 부정 2인, 승 2인, 겸승(兼丞) 2인, 주부 2인, 겸주부(兼注簿) 2인, 장루 4인, 시일 4인, 사력 4인, 감후 4인, 사신 4인 등을 두었다.
1425년(세종 7)에 이르러서는 금루(禁漏)를 분리하여 천문(天文) 20인, 금루 40인으로 하였다. 1433년에는 중국 흠천감(欽天監)의 예를 따라 다시천문에 합속(合屬)시켰다.
뒤에 서운관이 관상감으로 명칭이 바뀌자 직제도 그를 전후해서 바뀌었고 성종 때 완성된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1품 영사(領事)는 영의정이 겸임하고그 밑에 정3품 당하관(堂下官) 정이 1인, 종3품 부정 1인, 종4품 첨정(僉正) 1인, 종5품 판관 2인 등을 두어 모두 24인을 두었다. 이것이 뒤에 다시 개정되어서 영사 1인은 역시 영의정이 겸직하고, 그 밑에 종2품 이상자로 제조(提調) 2인을 겸임하게 하고 다시 그밖에 정원 없이 당상(堂上)을 두게 하였다.
그 아래는 종전과 같이 정3품 당하관인 관상감 정(正) 등을 두었다. 관상감에 근무한 인원은 생도 60인을 포함하여 모두 200인을 훨씬 넘었다. 이 직제와 인원수는 조선시대에 있어서 관상감이 얼마나 존중되었는가를 말하여준다. 특히, 영의정이 그 최고의 책임을 겸직한 예는 전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일이다.
(3) 음양과 시취
조선조 초기부터 과거(科擧)에는 문과·무과 이외에 잡과(雜科)가 있었다. 잡과는 다시 역과(譯科)·의과(醫科)·음양과(陰陽科)·율과(律科)로 나누어졌고 관상감원은 그 중의 음양과 출신들로 충당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사대부 자제가 잡과 응시를 기피한 듯하고, 역상(曆象)에 관한 중요한 직무는 문과출신들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 중엽 이후부터는 잡과출신들이 중인(中人)이라는 특수한 계급을 형성하여 역(譯)·의·음양·율의 일을 반세습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이들 중인출신자는 관상감에서 정 이하의 직책을 맡아서 그위의 영사와 제조의 지시를 받았다. 여기서 양반출신자와 중인출신자의 협력이 필요하였으며, 실질적으로 역법의 도입이나 의상(儀象)의 제작, 도서의 저술에서 그들의 협력의 자취가 매우 뚜렷하였다.
음양과의 과시(科試)에는 예조당상(禮曹堂上) 3인과 관상감제조 1인이 시관(試官)이 되었는데, 시험과목으로는 천문학에는 《보천가 步天歌》, 외우거나 그리기[誦或圖], 《대명력大明曆》의 일월식(日月食), 《칠정산내편 七政算內篇》의 일월식, 오성(五星:木火土金水), 태양력일(太陽曆日), 교식(交食)의 추보가령(推步假令), 사여성(四餘星), 중성(中星)의추보(推步), 태음(太陰), 《칠정산외편》의 일월식계산 등이었다.
지리학에서는 청오경(靑烏經)·금낭경(錦囊經)·착맥부(捉脈賦)·지남변망(指南辨妄)·의룡감룡(疑龍감龍)·명산론(明山論)·곤감가(坤鑑歌), 호순신(胡舜申)의 지리문정(地理門庭)·장중가(掌中歌)·지현론(至玄論)·낙도가(樂道歌)·입시가(入試歌)·심룡기(尋龍記), 이순풍(李淳風)의 극택통서(剋擇通書)·동림조담(洞林照膽)이었다.
명과학(命課學)에서는 원천강(袁天綱)·삼진통재(三辰通載)·대정수(大定數)·범위수(範圍數)·육임오행정기(六壬五行精記)·극택통서·자미수(紫微數)·응천가(應天歌), 서자평(徐子平)의 현여(玄輿)·난대묘선(蘭臺妙選)·성명총화(星命摠話) 등이었다.
그러나 뒤에는 약간씩 바뀌어서 천문학에서는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에 의한 계산이 《시헌력 時憲曆》에 의한 계산으로 바뀌게 되고, 따라서 《수리정온 數理精蘊》과 《역상고성 曆象考成》이 시험과목으로 되었다. 중인 자제로서 이 잡과 중의 음양과 천문학을 응시한 사람은 모두 위와 같은 공부를 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그 일가친척으로부터 천문학을 배우고 응시하여 합격되면 관상감원으로 임용되었다. 조선조 후반기의 관상감에서 이들 중인들이 직업적 천문가를 형성하였던 것은 조선조 천문학에 있어서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4) 의상(儀象)
천문관계 기구로서 관상감 기타에 설치한 의상도 조선시대에 와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크게 발달하였다. 우선 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자 서울 종가(鐘街)에 경루(更漏)를 설치하여 백성에게 시간을 알렸고, 권근(權近)의 노력으로 새로이 그린 천문도(天文圖)를 돌에 새겼다. 이 석각천문도는 현재 창덕궁에 보관되어 있다.
세종대에 와서는 왕의 주도하에 여러가지 기구가 제작되어서 서운관이 크게 정비되었다. 1432년(세종 14)에 정초(鄭招)·정인지(鄭麟趾)로 하여금 고전을 연구하게 하고, 이천(李천)·장영실(蔣英實)은 공역(工役)을 감독하게 하여 목간의(木簡儀)를 만들어서 한양의 북극출지(北極出地), 즉 위도(緯度)를 측정하였다.
그뒤 1439년에 이르러 동(銅)을 부어서 만든 대간의(大簡儀)·소간의(小簡儀)와 혼의(渾儀)·혼상(渾象)·현주일구(懸珠日晷)·정남일구(定南日晷)·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자격루(自擊漏)를 완성하였다. 간의(簡儀)와 앙부일구는 원나라 곽수경(郭守敬)의 법을 따랐고, 혼의·혼상은 원나라 오징(吳澄)의 책을 따랐다.
이들 의상이 완성되자 호조판서 안순(安純)을 시켜서 경회루 북쪽에 높이 31척, 길이 47척, 너비 32척의 석대(石臺)를 쌓게 하여 그 위에 간의를 안치하고 그 간의 남쪽에는 정방안(正方案)을 설치하였으며, 석대 서쪽에는 40척 높이의 동표(銅表)를 세우고 그 아래에 청석(靑石)으로 규(圭)를 만들어 경부(景符)를 써서 정오(正午)의 표의 그림자 길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동표 서쪽에 소각(小閣)을 지어서 혼의와 혼상을 안치하였다.
소간의는 두개를 만들어 하나는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설치하고, 하나는 서운관으로 보냈다. 앙부일구는 그 위에 시신(時神)의 그림을 그려서 아무나 보아도 곧 시각을 알게 만들어서 하나는 혜정교(惠政橋)가에 놓고, 하나는 종묘(宗廟) 남쪽 거리에 놓았다. 일성정시의는 모두 네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춘전(萬春殿) 동쪽에 놓고, 하나는 서운관에 보내고, 둘은 동서양계(東西兩界)의 원수영(元帥營)에 보냈다.
자격루는 물의 힘으로 자동적으로 운행하면서 시각을 알리는 장치로, 이를 경회루 남쪽에 지은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하여 작동하도록 하였다. 또, 이와는 별도로 흠경각을 천추전 서쪽에 짓고 그 속에 천지(天地)의 운행을 보여주는 기계장치를 하여 수력으로 돌게 하였다. 이 보루각과 흠경각의 장치는 매우 정교한 것으로 세종대의 기계기술의 정화라고 할만하다. 이밖에도 좀더 간편한 소정시의(小定時儀)와 행루(行漏)도 제작, 사용하였다. 1433년(세종 15)에는 또다시 천문도를 돌에 새겼다고 하는데, 현존하지 않는다.
1442년(세종 24)에는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였는데 이 우량측정도 서운관원 업무의 하나였다. 1466년(세조 12)에는 왕 자신이 규형(窺衡)과 인지의(印地儀)를 만들었다. 모두 측량에 필요한 기구이다. 1491년(성종 22)에는 천체관측으로 누각에 의한 보시(報時)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규표 세개를 만들어서 하나는 내전(內殿)으로 들이고, 하나는 정원(政院), 하나는 홍문관에 설치하였다.
1494년(세종 25)에는 영사 이극배(李克培), 이조참판 안침(安琛), 도승지 김응기(金應箕), 홍문관교리 최부(崔簿) 등을 시켜 설계하고 부정(副正) 이지영(李枝榮), 천문학 습독관(習讀官) 임만근(林萬根)으로 동역(董役)하게 하여 소간의를 제작하였다. 1526년(중종 20)에 사성(司成) 이순(李純)이 중국의 《혁상신서 革象新書》를 참고하여 목륜(目輪)을 제작하여 관상감에 설치하였고, 이해 세종대에 만든 여러 의상이 모두 낡았기 때문에 이들을 중수하는 한편 또 부건(副件)을 만들어서 관상감에 설치하였다.
1535년(중종 30)에는 누각을 주조하였는데 이는 현재도 덕수궁에 진열되어 있다. 1546년(명종 1)에는 관상감을 시켜 간의대와 규표를 중수하게 하였고, 이때하세순(河世純)이 양쪽 대궐의 보루·일영(日影) 등의 기구와 관천의상(觀天儀象)을 수리하였다. 1548년(명종 3)에는 관상감에 명하여 혼천의(渾天儀)를 만들게 하여 홍문관에 설치하였고, 1550년(명종 5)에는 종묘 동구에 있는 앙부일구를 개수하게 하였다.
이밖에도 기록에 누락된 의상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들은 거의 다 임진·정유의 왜란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왜란이 끝나자 1601년(선조 34)에는 영감사(領監事) 이항복(李恒福)에게 명하여 의상을 중수하게 하였다. 이항복은 간의(簡儀)의 방부(方趺)를 얻어 노공(老工) 2인과 더불어 구제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우선 만들기 어려운 누기(漏器)·간의·혼상부터 복구하고, 그밖의 규표·혼의·앙부일구·일성정시의 등의 기구는 미처 만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1614년(광해군 6)에는 흠경각·보루각을 창덕궁 서린문(瑞麟門) 안에 세웠으나 흠경각은 효종 때 헐고 그 자리에 만수전(萬壽殿)을 지었다.
1657년(효종 8)에는 혼천의를 만들게 하였다. 이보다 먼저 강관(講官) 홍처윤(洪處尹)이 혼천의를 만들었으나 도(度)가 맞지 않는 곳이 많아서 이번에는 김제군수 최유지(崔攸之)를 시켜서 만들게 하였는데, 이것은 물의 힘으로 스스로 돌아가게 한 것이었다. 1664년(현종 5)에는 효종 때에 최유지가 만든 혼천의가 고칠 곳이 있다 하여 송이영(宋以穎)·이민철(李敏哲)을 시켜서 측후하는 기계를 개조하게 하여 이를 궁중에 놓았다.
1669년(현종 10)에 좨주(祭酒) 송준길(宋浚吉)의 청에 따라 이민철로 하여금 《채씨순전 蔡氏舜典》에 의하여 혼천의를 만들게 하였다. 이는 수격지법(水激之法), 즉 수력으로 운전하는 혼천의였다. 이에 대하여 송이영이 만든 혼천의는 서양의 자명종(自鳴鐘)식의 아륜호격지제(牙輪互激之制), 즉 톱니바퀴를 써서 자동으로 가게 한 것이었다. 즉, 송이영은 북경을 통하여 전래된 서양의 시계기술을 혼천의 제작에 적용하여 수력이 아닌 추(錘)에 의한 자동 혼천의를 만들었던 것이다.
1687년(숙종 13) 이민철에게 명하여 현종조의 혼천의를 중수하여 새로 지은 제정각(齊政閣)에 안치하게 하였다. 1704년(숙종 30)에도 감관 안중태(安重泰)와 이시화(李時華)가 부건(副件) 혼천의를 만들었다. 숙종 때에는 또 국초에 만든 석각천문도가 마모되었기에 새로이 천문도를 돌에 새겼다. 1723년(경종 3)에는 서양의 것을모방하여 문신종(問辰鐘)을 제작하였다.
1732년(영조 8)에는 숙종 때 만든 부건 혼천의가 오래되어 차이가 나므로 안중태 등을 시켜 중수하게 하여 규정각(揆政閣)을 지어서 그속에 안치하였고, 1770년(영조 40)에는 국초의 석각천문도가 경복궁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거두어서 관상감으로 옮겨서 숙종 때 새로 만든 석각천문도와 나란히 흠경각 속에 보관하게 하였다. 영조조에는 또 1708년(숙종 34)에 관상감에서 올린 탕약망(湯若望, Shall, A.)의 〈적도남북총성도 赤道南北總星圖〉를 본떠서 새로이 이와같은 총성도를 만들었는데, 이는 현재 법주사(法住寺)에 보관되어 있다.
1777년(정조 1)에 제조 서호수(徐浩修)가 관장하고 감관(監官) 이덕성(李德星) 등이 함께 규정각의 혼천의를 중수하였으며, 1789년(정조 13)에는 감관 김영(金泳) 등이 적도경위의(赤道經緯儀)와 지평일구(地平日晷)를 주조하여 올리고 부건은 관상감에 설치하였다.
이상이 조선시대에 제작된 의상의 대체적인 기록이다. 그러니 기록에서 빠진 기구가 많은 것도 틀림없다. 국가에서 제작한 것 이외에 개인이 제작한 것으로도 홍대용(洪大容)의 농수각(籠水閣)에 설치하였던 통천의(統天儀)·혼상의(渾象儀)·측관의(測管儀)·구고의(勾股儀) 등이 있었고, 철종 때의 남병철(南秉哲)이 저술한 《의기집설 儀器輯說》에는 혼천의이외에 혼개통헌의(渾蓋通憲儀)·간평의(簡平儀)·험시의(驗時儀)·적도고일구의(赤道高日晷儀)·혼평의(渾平儀)·지구의(地球儀)·구진천추합의(句陳天樞合儀)·양경규일의(兩景揆日儀)·양도의(量度儀)에 대한 해설이 실려 있다.
이로 보아 이러한 의기(儀器)도 조선조 말엽에 이를 때까지는 계속하여 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밖에도 개인이 소장 또는 휴대하였던 각종 일구의 종류도 많이 남아 있다.
(5) 관측기록
조선시대의 여러 관측에 관한 기록은 과학적인 것과 점성적인 것이 서로 섞여서 조선왕조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실려 있다. 관측한 대상은 일식·월엄범오위(月掩犯五緯:달이 行星을 가리는 현상)·오위엄범(五緯掩犯:행성끼리 접근하는 현상)·오위합취(五緯合聚:여러 개의 행성이 한데 모이는 현상)·오위엄범항성(五緯掩犯恒星: 행성이 항성에 접근하는 현상)·성주현(星晝見:금성이나 목성이 낮에 보이는 현상)·객성(客星:瑞星이나 妖星의 출현)·혜패(彗패:혜성의 출현)·천변(天變:하늘에서 큰 소리가 나는 현상과 같은 것)·일월변(日月變:흑점이나 해와 달의 빛에 이상이 생기는 현상)·운적(暈適:白虹貫日과 같은 해와 달의 무리가 나타나는 현상)·성변(星變:별이나 행성이 흔들리거나 모이거나 하는 현상)·유운(流隕:유성이 떨어지는 현상)·운기(雲氣:하늘의 갖가지 색의 빛이 나타나는 현상)에서부터 물이(物異)라고 하여 여러가지 기상이변이나 지진과 생물학적 이변과 같은 현상이 있어서 많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특히, 기상현상과 천문현상 사이의 뚜렷한 구분이 없었던 것은 동서가 마찬가지였다. 다만 조선조 말엽까지도 확실한 구분 없이 내려왔던 것은 그만큼 천문학의 현대화가 늦었던 까닭이다.
이러한 현상의 관측, 관찰 중에서도 백홍관일(白虹貫日)·백홍관원(白虹貫圓)·지진·지동(地動)·객성·혜성·패성(패星:혜성의 일종)·치우기( 尤旗:혜성의 꼬리가 깃발과 같이 흰것)·영두성(營頭星:낮에 별이 떨어지는 것) 등은 관측되는 즉시 관상감 상번자(上番者)가 승정원·시강원에 가서 구두로 보고하고, 밤이면 소단자(小單子)를 만들어서 문틈으로 넣었다. 또, 중번(中番)·하번(下番)은 각기 삼상(三相)과 양제조(兩提調)에 사람을 시켜서 보고하였다. 이 단자를 성변측후단자(星變測候單子)라고 하였다.
그밖의 일월식·일월색적(日月色赤)·일월운(日月暈)·이(珥)·관(冠)·배(背)·포(抱)·경(瓊)·극(戟)·이(履)·일중흑자(日中黑子)·월오성범식입(月五星犯食入)·태백주현(太白晝見)·유성비성(流星飛星)·운기(雲氣)·화광(火光)·홍(虹)·뇌동(雷動)·전광(電光)·박(雹)·무(霧)·상(霜)·설(雪)·우(雨)·토우(土雨) 등의 현상도 서식에 따라 계(啓)하고, 또 《풍운기風雲紀》에 기록하여 올렸다.
이 보고의 내용과 형식으로도 천문과 기상의 구별이 없었던 사실과 또 어떤 미신적인 요소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관측기록중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1572년(선조 5)의 티코 부라헤(Tycho Brahe)의 초신성(超新星)과 1604년(선조 37)의 케플러(Kepler) 초신성에 대한 관측기록은 회수나 정확도가 높아서 현대천문학의 연구에도 크게 기여를 했다는 사실이다.
(6) 역법
조선조에서 사용한 역법은 국초에는 고려말과 같이 《수시력》·《대통력》과 일부는 《선명력》을 썼으나, 세종 때에 이르러서 《수시력》과 《대통력》의 완전 소화와 사용을 서둘렀다. 1433년(세종 15)에 정초·정흠지(鄭欽之)·정인지를 시켜서 명나라의 원통(元統)이 편찬한 《대통력통궤 大統曆通軌》를 연구하고 교정하여 《칠정산내편》을 편찬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 실무는 이순지(李純之)·김담(金淡)이 담당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규장각(奎章閣)의 《칠정산내편》이 이순지·김담이 명을 받아 편찬한 것으로 되어 있고, 이 저자들은 또 별도로 《대통력일통궤 大統曆日通軌》·《태양통궤 太陽通軌》·《태음통궤 太陰通軌》·《교식통궤 交食通軌》·《오성통궤 五星通軌》·《사여전도통궤 四餘纏度通軌》 등의 《대통력일통궤》의 각론(各論)에 대한 저술을 남겼을 뿐 아니라 《칠정산내편》 《정묘년교식가령 丁卯年交食假令》도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이 《칠정산내편》은 명나라와의 정치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역원은 《대통력》의 홍무(洪武) 17년(1384)을 따르지 않고 원나라의 지원(至元) 17년(1280)으로 하였으며, 《대통력》에서 말소하였던 세실(歲實)의 소장지법(消長之法)을 복구, 채택하고 있다. 1393년에 명나라의 이덕방(李德芳)이 《대통력법》에서 세실소장지법을 폐한 것이 잘못이라고 주창한일이 있었다. 우리 학자들이 이 주장을 받아들였는지 아니면 자신들이 그것을 옳다고 판단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매우 현명하게 이 세실소장지법을 복구하였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칠정산내편》 3권의 체재도 《수시력》과 《대통력》의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려서 매우 정돈되고 체계적으로 편찬되어 있다. 이렇게 하여 《칠정산내편》은 《수시력》과 《대통력》을 완전히 소화하여 재정비하고 우리나라의 지리적 조건에 맞도록 적용하는 등 자주적인 솜씨가 뚜렷한 역서로서 그만큼 높이 평가될 만하다.
원나라는 서방에서 아랍의 역을 도입하여 보조력(補助曆)으로 사용하였고, 명나라도 이를 한어(漢語)로 번역, 간행하여 사용한 《회회력 回回曆》이 있었다. 세종은 이 회회력도 이순지와 김담을 시켜서 우리나라에 맞도록 교정해서 《칠정산외편》 5권과 《정묘년교식가령》을 편찬하게 하였다.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은 모든 수치가 한양을 기준하여 계산한 값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나라에서 쓰는 데 편리하게 되어 있다. 이후에는 이 《칠정산내편》으로 역의 계산을 하였고, 《칠정산외편》으로도 교식, 기타를 계산하여 보조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한편, 《중수대명력 重修大明曆》·《경오원력 庚午元曆》도 이순지·김담을 시켜 교정, 편찬하게 한 것으로 보아 이들 역법도 역시 제3의 보조역으로 교식 등의 추보에 사용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생각된다.
그뒤 중국에서는 명말(明末)에 서양인 신부(神父) 이마두(利瑪竇)가 와서 서양의 천문학을 전하자, 서광계(徐光啓)가 주가 되어 이지조(李之藻) 등의 협력으로 《숭정역서 崇禎曆書》를 편찬하였으나 시행을 보지 못하고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청나라가 들어서자 순치원년(順治元年, 1644)에 탕약망의 《숭정역서》를 재정리한 《신법서양역서 新法西洋曆書》를 시행하기로 결정을 보았고, 그 다음해부터 실시하였다. 이것이 곧 《시헌력 時憲曆》이다.
1644년(인조 22)에 관상감제조 김육(金堉)이 《시헌력》의 도입, 시행을 건의하였고, 다음해에는 세자가 청나라의 인질에서 풀려나오면서 탕약망으로부터 기증받은 천문역법의 서적을 가지고 돌아왔다. 1646년에는 김육이 연경(燕京)에 가는 길에 김상범(金尙范) 등 역관(曆官) 2인을 대동하여 시헌력법을 배우게 하고자 하였으나, 흠천감의 문금(門禁)이 심하여 탕약망을 만나지 못하고 역서만 구득하여 돌아왔다.
그뒤 1651년(효종 2)에도 다시 김상범을 연경에 보내어 역법을 배워오게 하여 1653년(효종 4)부터는 조선에서도 《시헌력》을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오성법(五星法)에 관한 입성(立成:수치표)을 얻지 못하여 오성의 계산은 그대로 칠정산법을 따랐다. 그래서 1655년(효종 6)에 다시 김상범을 연경에 보냈으나 도중에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뒤 얼마 동안 청나라에서 시헌력법에 대한 반대론이 일어서 일시 이를 폐지한 일이 있었다가 다시 복구되었다(1665∼1669).
이동안에는 《시헌력》 도입도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1705년(숙종 31)에 관상감원 허원(許遠)을 연경으로 보내서 《시헌력》 칠정표(七政表)를 구득하여 와서 이후 3년에 걸쳐 이를 연구하여 1708년부터는 역계산을 모두 시헌력법에 의하게 되었다. 김육의 《시헌력》 시행의 건의로부터 실로 60여년이 걸려서 거의 완전히 소화, 실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뒤에도 연근법(年根法)에 대한 미심점 등이 남아서 서신을 통하여 흠천감원에게 질문을 한 일도 있었고, 허원을 다시 북경까지 보낸 일도 있었다.
그뒤 중국인 하국종(河國琮)·매각성(梅殼成) 등이 《신법서양역서》의 단점을 보완, 정비하여 1721년에 《역상고성》 상·하편을 완성시켰다. 이는 역원을 강희 23년(1684)으로 잡은 것인데, 그뒤 옹정(雍正)초에 서양인 대진현(戴進賢, Kogler,I.)·서무덕(徐懋德, Pereira,A.)이 일전월리표(日纏月離表)를 교정, 수리, 해설하여 보완하였다.
조선에서는 먼저의 시헌력법, 즉 탕법(湯法)을 버리고 이 《역상고성》 상·하편법인 매법(梅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매법은 탕법과 크게 차이나는 것이 아니었으나 계산에서 24기(氣) 합삭현망(合朔弦望)이 실제와 맞지 않아서 관상감원을 누차에 걸쳐 연경까지 파견하였다. 《역상고성》의 도입에는 《역상고성》과 함께 3부작의 율력연원(律曆淵源)을 이루는 《수리정온》·《율려정의 律呂正義》도 도입, 연구되었다. 《수리정온》은 역법을 위한 수학을 총망라한 책으로서 시헌력법에 의한 역의 추보(推步)에 기초가 되었다.
그 뒤 중국에서는 1742년에 흠천감 정(正) 및 부정(副正)이었던 서양인 대진현·서무덕과 프랑스인 카시니(Cassini, 갈西尼)의 관측치와 케플러(Kepler, 刻白爾)의 행성운동법칙을 도입하여 《역상고성》 후편을 편찬하였다. 이는 타원궤도(楕圓軌道)를 도입한 것으로 이 점에서 매법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또 이 대법(戴法) 또는 갈법(갈法)을 도입, 시행하여야 하였다.
1744년(영조 20)까지 연경에 간 역관 안국린(安國麟)·변중화(卞重和)가 안명열(安命說)·김정호(金挺豪)·이기흥(李箕興)과 황력재자관(皇曆재咨官) 김태서(金泰瑞, 또는 兌瑞)가 이들을 사들였다. 관상감원은 이 대법의 연구에 몰두하여 다시 새로운 대법의 시행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대법은 일전과 월리에만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일전(日纏)과 월리(月離)와 교식(交食)만 대법에 따르고 오성은 여전히 매법에 따랐다.
1782년(정조 6)에는 시헌법에 의한 《천세력》도 간행을 보게 되었다. 조선말에 서양문물이 일본을 통하거나, 또는 직접 구미로부터 흘러들어오게 되자, 1905년(고종 건양원년)에 이르러 드디어 종전의 중국식 음양력을 버리고 만국공용의 서양식의 태양력, 즉 그리고리역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시헌력》도 참용(參用)하기로 한 것이며, 민간에서는 그뒤에도 오랫동안 음력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
(6) 경위도 관측
조선시대에는 역법의 기초가 되는 한양의 위도와 경도, 즉 북극고도(北極高度)와 연경을 기준으로 한 동서편도(東西偏度)를 결정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세종조에 역관 윤사웅(尹士雄)·최천구(崔天衢)·이무림(李茂林) 등을 각각 강화의 마니산, 갑산(甲山)의 백두산, 제주의 한라산에 보내어 그곳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였다. 이 값을 《관상감일기 觀象監日記》에 기재하였으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1713년(숙종 39)에 청나라의 목극등(穆克登)이 사력(司曆) 5인을 거느리고 와서 백두산 국경문제를 정하였을 때, 하국주(河國柱)가 상한대의(象限大儀)를 가지고 한양의 북극고도를 측정하여 37°39′15″를 얻었고, 이 값은 《역상고성》에 기재되었다. 고려 때에는 원나라에서 개경의 북극고도를 측정한 값이 38도 1·4로 《수시력》에 기재되었다.
이 값은 원주를 365°25′로 한 도수이므로 현행법(역상고성법)으로 고치면 37°41′여가 되어 위의 한양북극고도와 비슷하다. 1791년(정조 15)에는 한양의 북극고도의 값을 기준으로 하고, 팔도여도(八道輿圖)를 이용하여 8도의 관찰(觀察) 소재지의 위도를 결정하였다. 그 값은 관북(關北, 咸興) 40°57′, 관서(關西, 平壤) 39°33′, 해서(海西, 海州) 38°18 ′, 관동(關東, 原州) 37°6′, 호서(湖西, 公州) 36°6′, 영남(嶺南, 大邱) 35°21′, 호남(湖南, 全州) 35°15′를 얻었다. 한양의 동서편도는 연경의 동쪽 10°31′으로 결정되었다.
이 값은 《역상고성》에 기재된 값이다. 이는 남회인(南懷仁)이 만든 〈곤여도 坤輿圖〉와 일치되는 값이다. 1791년에는 역시 팔도여도로 각 관찰영의 한양을 기준으로한 동서편도를 결정하였고, 그 값은 관북 편동(偏東) 1°, 관서 편서 1°15′, 해서 편서 1°24′, 관동 편동 1°3′, 호서 편서 9′, 영남 편동 1°39′, 호남 편서 9′ 이다. 혼(昏)과 신(晨), 즉 저녁과 새벽의 정확한 시각을 알기 위하여는 계절에 따라 특정 별의 중성(中星)의 자오선(子午線) 통과가 기준이 된다. 그러나 세차(歲差) 때문에 별이 1년에 51초씩 동행하여 별의 위치는 고금이 맞지 않는다.
태조조에 기도구본천문도(箕都舊本天文圖)를 얻었으나 실제와 맞지 않아서 서운관으로 하여금 다시 계산하도록 하여 각 계절의 중간에서의 혼효(昏曉)의 중성을 결정하여 《신법중성기 新法中星記》를 편찬하였다(태조 4). 1789년(정조 13)에 영감사 김익(金익)이 경루(更漏)를 바로잡기 위하여 중성을 바로잡아야 한다 하여 김영을 시켜 적도경위의와 지평일구를 각각 2좌(座) 제작하여 관측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신법중성기》와 《누주통의 漏籌通義》 각 1권씩을 편찬하게 하였다.
적도경위의의 제작에는 역관 이덕성 등이 참여하였고, 《신법중성기》에는 김종수(金鍾秀)가 서문을 썼다. 이 《신법중성기》는 정조 7년(1783)을 기준으로 한 항성의 위치를 가지고 계산한 것이다. 이 중성표에는 홍무 28년(1395)의 항성위치를 기준으로 한 서운관사(書雲觀事) 유방택(柳方澤)의 계산을 참고로 제시하고 있다.
(7) 천문학자
조선시대에 천문학을 연구하거나 실무에 종사한 천문학자는 크게 두가지 범주로 갈라진다. 하나는 중인출신의 직업천문업에 종사한 학자이며, 하나는 양반출신의 천문학자이다. 후자는 다시 관상감제조 또는 영사의 고급관원이었던 사람과, 재야(在野)에서 연구한 학자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초에는 대개 문과에 합격한 사람들이 각자의 의사에 따르거나 왕명에 따라 천문·역산(曆算)을 공부하고 연구하여 천문·역법·의상의 발달에 공헌한 사람이 많았다. 이미 앞에서 언급한 권근·정초·정흠지·정인지·이순지·김담·이천·김돈(金墩)·김빈(金빈) 등이 모두 그러한 사람이었다.
특히, 이순지와 김담은 국초에 있어서의 최대의 천문학자로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비롯하여 그의 편찬에 필요한 《대통력》의 여러 통궤(通軌)와 그밖의 몇 가지 역법에 관한 공동저술을 남겼고, 이순지는 다시 왕명을 받들어 중국 역대의 역상에 관한 저술을 정리, 편찬한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 4권과 항성과 별자리에 관한 《천문유초 天文類抄》도 저술하여 천문서적출판에 있어서 공전의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중 《천문유초》는 음양과 과거에서 《보천가》를 대신하여 교과서의 하나로 되기도 하였다.
그뒤 역대 영의정으로서 관상감의 영사나 제조를 겸한 사람 중에서 상당수가 천문·역법·의상에 관한 지식이 높아서 작건 크건 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관상감제조를 겸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천문·역상에 일가견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이극배·이항복·김육·이이명(李이命)·남구만·김응기·상진·김익수·서호수·남병철·남병길(南秉吉) 등이 그러한 사람으로서 이름을 전한다. 김육은 효종 때에 《시헌력》 도입에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고, 서호수는 정조 때에 《신법중성기》·《서운관지 書雲觀志》·《국조역상고 國朝曆象考》 등의 출간과 제반 의상의 제작을 주도하였으며, 그의 아버지 서명응(徐命膺)도 2종의 천문서를 남겼다.
남병철·남병길 형제는 철종 때 제조를 맡아서 활약하고, 《의기집설》·《시헌기요 時憲記要》·《성경 星鏡》 등 10여종의 저술을 남겨 조선조 말기의 천문학에 마지막 불을 밝혔던 사람이다. 이들 고급문관의 천문학에서의 업적을 도운 것은 관상감에서 천문·역법·측후 등의 실무를 담당하였던 사람들로 과거의 잡과 중 음양과를 통한 사람들이었다. 김육이 《시헌력》을 도입할 때에 그 계산법을 연구하였던 역관 김상범·허원 등이 그러한 사람이었다.
정조 때 서호수의 주도하에서 《서운관지》·《국조역상고》·《신법중성기》·《누주통의》 등을 저술, 편찬한 성주덕(成周德)과 김영은 이들 저술을 통하여 불멸의 업적을 남겼을 뿐 아니라 또 적도경위의·지평일구 등의 제작에도 힘썼다. 이에 앞서 수격법(水激法)·아륜호격법(牙輪互激法)에 의한 혼천의를 제작한 이민철·송이영도 이러한 사람이었으리라 생각된다. 조선말에 관상감원 이상혁(李尙爀)과 이준양(李俊養)도 남병길과의 공저와 단독으로 역법에 필요한 수학서(數學書)를 남기고 있다.
관에 나가서 그 직무와 관련하여 천문·역산의 일에 관여한 이들 학자들과는 별도로 야(野)에 있으면서 또는 말직에 있으면서 천문학을 연구한 학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러한 학자가 나온 이유로는 조선에 들어와서 성하여진 성리학 자체가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존중하고, 또 음양오행류의 자연철학으로 엮어져 있기 때문이었다고 해석된다. 특히, 장재(張載)의 학문에 기울었던 서경덕(徐敬德)이나 그러한 경향을 띠었던 정렴(鄭렴) 같은 사람이 한층 더 천문학적인 지식에 접근하였었고, 이황(李滉)도 도산서원(陶山書院)에 혼상(渾象)으로 보이는 유물을 남기고 있고,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도 혼천의의 모형을 남겼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서 실학이 성하여지자 이 경향은 더욱 뚜렷하여졌다. 백과전서적인 이수광(李수光)의 《지봉유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 황윤석(黃胤錫)의 《이수신편理數新編》,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 김석문(金錫文)의 《역학도해 易學圖解》, 홍대용(洪大容)의 《담헌서 湛軒書》, 최한기(崔漢綺)의 명남루전서(明南樓全書) 등에 상당한 양의 새로운 천문지식에 관한 것이 기재되어 있다. 그밖에도 많은 사람이 천문학을 연구하여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재야의 학자 가운데서 일어났던 지전설(地轉說), 즉 지구자전의 주장은 조선시대 천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이다. 지전설은 김석문의 《역학도해 易學圖解》에 처음으로 나타나 일반에서는 이른바 삼대환부공설(三大丸浮空說)로 전파되었다.
김석문은 서양인 나아곡(羅雅谷, Rho,J.)의 저서 《오위역지 五緯曆指》 속에 지구자전설이 있으나 전혀 틀린 이야기라는 내용에 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석문은 관측에서 얻은, 지구에서 먼 천체일수록 지구에 대한 회전이 느리다는 사실에서 지구의 표면도 그 중심 둘레를 가장 빠른 속도로 돈다고 결론지었던 것이다. 이 지전론은 홍대용의 《담헌서 湛軒書》 중의 <의산문답 醫山問答>에서 더욱 과학적인 형태로 설명되어 있고, 박지원은 이 설을 연경의 중국 학자에게 선전하였던 것이다. 김석문이 《오위역지》에서 지구자전에 대한 암시를 받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자전론을 유도한 논리는 《오의역지》에는 전혀 없는 것이다. 지구자전의 가능성은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나와 있고, 홍대용은 보다 넓은 우주관과 더불어 이를 기록하고 있다.
조선 말기 서양문명이 들어오자 각지에 학교가 설립되고 새로운 지식으로 엮어진 교과서가 사용되게 되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의 일이다. 이 중 일본의 것을 번역한 《지문학地文學》이라는 교과서가 있었고, 이 속에 천문학에 관한 초보적인 지식이 기술되어 있었다. 여기서 비로소 우리나라 사람이 현대적인 서양 천문학을 접촉하게 된 것이다.
1908년에는 정영택(鄭永澤)이 서양 천문학서를 번역하여 출판하였고, 평양의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에서도 번역된 천문학서를 교과서로 사용하였다. 이렇게 하여 조선은 그 마지막 시기에 현대적 천문학에 접할 수 있었으나 곧 일본의 침략으로 모든 것이 그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300명 가까이에 달하는 인원으로 구성되었던 관상감도 해체되고, 그대신 조그마한 조선총독부 관측소를 세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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