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드라마] 이기사 아니죠.. 익위사 맞습니다~

zzixxa 2008.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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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을 보노라면 세자의 호위부대인 익위사가 나옵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익위사를 호칭할 때 익위사가 아닌 이기사로 들려서익위사를 이기사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모양입니다.

이거야 구개음화? 자음접변?.. 뭐 이런 문법 따지기 전에 입에서 나오는 소리니 뭐라겠습니까만은 그래도 호칭하나라도 정확히 알고 들으면 좀 나을 것 같아 주절거립니다.

이왕 시작한 김에 익위사가 뭔지나 정확히 알아보렵니다. 물론 이산을 보시는 분은 세자 호위부대인 건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요..

워낙 많이 알려진 것이고 해서 깊게 안파고 백과사전만 인용하고 마치겠습니다.

 

세자익위사 (世子翊衛司)


요약 : 조선시대 동궁(東宮)의 시위(侍衛)를 맡아본 관청.
계방(桂坊)이라고도 한다. 병조(兵曹)의 속아문(屬衙門)으로, 세종 때에 설치하였다. 

관원으로는 정5품 좌·우익위(左右翊衛) 각 1명, 종5품 좌·우사어(左右司禦) 각 1명, 정6품 좌·우익찬(左右翊贊) 각 1명, 종6품 좌·우위수(左右衛率) 각 1명, 정7품 좌·우부수(左右副率) 각 1명, 정8품 좌·우시직(左右侍直) 각 1명, 정9품 좌·우세마(左右洗馬) 각 1명씩을 두었다. 1894년(고종 31) 익위사로 고치고, 칙임관(勅任官)으로 익위·사어·익찬·위수를, 주임관(奏任官)으로 부수·시직·세마를, 판임관(判任官)으로 전서관(典書官)을 두었다.

대충 넘어가고 싶었는데 이게... 벼슬이 꽤 나옵니다. 그쵸?

 

  • 익위 : 좌익위,우익위 각 1명이 있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좌·우익위를 통합하여 익위로 하고, 칙임관(勅任官)으로 보(補)하였다가 1895년 폐지하였다. 

  • 사어 : 좌사어,우사어 각 1명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설치되었던 종5품(從五品) 관직(官職). 정원은 1인이며, 세자를 배종(陪從)•호위하는 일을 담당했음. 

  • 익찬 : 좌익찬,우익찬 각 1명이 있었다. 조선 태조 때 설치되어 세자의 시위(侍衛)를 맡아본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정6품 관직.

  • 위수 : 좌위수,우위수 각 1명이 있었다. 직속 상관인 정4품 지원사(知院事)의 지휘를 받아 왕세자의 시위를 담당하였다. 

  • 부수 : 좌부수,우부수 각 1명이 있었다. 병조(兵曹)의 속아문 관청인 세자익위사에서 왕세자의 시위(侍衛)를 담당했으며, 정원은 각 1명이다. 

  • 시직 : 좌시직,우시직 각 1명이 있었다. 병조 속아문 관청인 세자익위사의 정8품 관리로서 세자의 시위를 담당했다. 

  • 세마 : 좌세마,우세마 각 1명이 있었다. 조선 시대 왕세자의 배종(陪從)과 시위(侍衛)를 담당하였던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에 두었던 정9품 무관 벼슬. 잡직(雜職)을 담당하였음. 

    원래 왕세자를 배호(陪扈)하면서 벼슬의 기한 만기인 9백일을 지나면 참상(參上)으로 승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처음에는 삭수(朔數)가 없어서 폐단이 됨. 이에 12삭을 지낸 뒤 시직(侍職)이 되고, 다시 12삭 후 부수(副率)가 되며, 또 12삭을 지내면 비로소 6품에 승품되어 위솔(衛率)이 될 수 있도록 하였음. 하지만 비록 12삭을 채웠다고는 하나 윗관직이 승급하지 못하면 따라서 승급할 수 없어, 그 사이 다른 기관에서 옮겨오는 관원에게 그 자리를 내주게 되는 폐단이 생기자 이에 윗자리에 관계없이 36삭을 채우기만 하면 6품으로 승진하도록 하였음. 





    더 이상은 능력이 딸려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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