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와 악명높은 환관들
중국 환관(내시)의 역사는 지금부터 수천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환관은 춘추시대에 이미 존재해온것으로 알려져있으며 이보다 더 이른 은, 주 시대에도 환관에 관한 기록이 전해진다. 환관은 중국 왕조의 탄생과 더불어 존재해왔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환관은 제왕을 보필하기 위해 거세되어 입궁한 남성들이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군주의 수족이자 노예에 불과했으나 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는 그들은 황제의 총애와 신임도 함께 얻을 수 있어 이를 이용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 사례가 많다. 역사 속의 악명 높은 환관들은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졌고, 심지어는 왕조를 멸망에 이르게 하기도 하였다.
진한대의 환관
진시황의 환관 조고는 일개 환관의 신분으로 진나라를 멸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조고는 시황제가 여행 중 병사하자, 승상 이사와 짜고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시황제의 맏아들 부소와 장군 몽염을 자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시황제의 총애를 받던 호해를 2세 황제로 옹립해 자신의 꼭두각시로 만든다. 이어서 2세 황제에게 참소하여 이사를 처형시킨 뒤, 반란이 일어난 와중에 승상이 되어 더욱 큰 권력을 얻었다.
이후 진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게 되자, BC 209년 2세 황제마저 모살하고 부소의 아들 자영을 다시 군주로 세우나 곧 자영에게 목숨을 잃는다. 자영도 겨우 재위 46일 만에 유방에게 항복함으로써 진나라는 3대 15년 만에 멸망한다.
당대의 환관
당은 환관이 황실과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왕조이다. 당 목종, 문종, 무종 등 당 중후기의 대다수의 황제는 환관에 의해 옹립되었다.
이 시기는 황제의 옹립과 폐위에서부터 조정의 대소사와 황실 인물들의 생사까지 모두 환관의 손바닥 안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환관들은 금군을 장악해 자신들을 호위하는 군권으로 삼고 권력을 행사했다.
한편 황제의 권력은 환관에게 초월당해 당 숙종, 헌종, 경종은 차례로 환관 이보국, 진홍지, 유극명 등의 손에 목숨을 잃는다.
이러한 와중에 당 문종은 부국강병책을 실시하고 인재를 등용하여 기울어가는 당의 국운을 일으키고자 하고, 그 일환으로 권세를 잡은 환관을 숙청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는 송신석을 재상으로 임명해 환관을 견제하고, 감로지변을 일으켜 환관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계획은 실패하고, 환관들에 의해 수 천명이 목숨을 잃는다.
명대의 환관
명대의 황제들은 환관을 중용하여 영락연간에 설립된 황실특별기구인 동창이 환관들에게 맡겨졌다. 성화 13년(1477년)엔 더 큰 규모로 서창이 추가되고, 환관 왕직이 이를 직접 관장했다. 여기서부터 명 왕조의 3대 해악으로 일컬어진 창, 금의위, 그리고 환관이 문제시되게 된다. 무종 정덕 원년, 환관 유근이 동서창을 통해 문무대신들을 통제하고 조정을 장악해 자금성이 공포에 휩싸였다. 몇 년 후, 동서광이 위충현의 손에 들어가자 환관의 횡포는 더욱 심각해졌다.
위충현은 원래 궁중의 요리사였는데 희종에게 음식으로 환심을 샀다. 후일 희종의 유모 객씨와 한통속이 되어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얻고 스스로 ‘구천세’를 자처한다.(황제에게는 만세라고 외침)
그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예가 있다. 위충현은 황제의 조서를 사칭해 장유비, 풍귀인 등 황제의 비빈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장황후에게도 악랄한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원대에 지어진 향산의 벽운사를 자신의 무덤으로 쓰겠다며 대규모 공사를 감행했는데 그 호화로움이 황실의 무덤에 버금갔다.
그러나 위충헌은 결국 이 호화로운 무덤에 들어가지 못했다. 후대 황제 집권 후, 위충헌은 곧바로 조정에서 축출되고, 유랑 중 목을 매 자진하기에 이른다. 그는 살아 생전 스스로를 위해 영화로운 무덤을 만들어두었지만, 실제로는 거리에 목이 효수되어 시체조차 온전히 보전하지 못했다.
만청 서태후 집권기의 환관
청대에는 명 왕조를 거울삼아 환관의 권력에 대해 제약을 가했다. 환관이 병력을 장악하거나 정치에 간섭하는 일도 불가능해졌다. 가경제 이전까지 환관의 수는 다소 늘다가 이후로 점차 감소해 2000명 선을 유지하였다. 만청에 이르면 궁궐 밖에 사는 환관까지 모두 합쳐도 1500명에 그치게 된다. 환관 수의 감소로 인력이 부족해지자, 궁 내의 잡역을 맡기기 위해 만 명에 가까운 외부인력을 입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서태후가 집권하면서 환관이 다시 발호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에 악명높았던 대표적 환관이 바로 안덕해와 이연영이다. 안덕해는 서태후의 총애를 업고 조정대신들 위에서 군림한 환관이다. 서태후의 신망을 받아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행사하나 마찬가지로 불운하게 일생을 마감했다. 안덕해는 자신의 권력을 믿고 공친왕에게 무례를 범했다가, 순행 중 허가 없이 출궁했다는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쓰고 사형당했다.
이연영은 본래 가죽신을 만드는 인물이었고, 머리 빗는 기술이 뛰어나 서태후에게 발탁된 환관이다.
이연영 역시 서태후의 권위를 배경삼아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서태후를 대신하여 이홍장의 북양 해군 열병식에 참가했을 정도로 막강한 위세를 과시했다. 서태후 휘하에서 서태후에게 물건을 바치는 이들에게서 상당한 양의 뇌물을 받았다는 내용도 전해온다.
그는 변법자강운동에 대항하여 서태후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과정에서도 일조한 바 있었으며, 특히 원세개와 손을 잡고 국정 전반에 걸쳐 그 세력을 장악하였다.
이연영은 안덕해의 죽음을 본보기로 삼아 서태후와 광서제 사이에서 비위를 맞추며 대총관의 자리까지 오른다. 원칙적으로 환관이 오를 수 있는 최고 지위는 4품 궁전감독영시인데 그는 2품인 대총관까지 오른 것이다. 나이가 든 후, 이연영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스스로 지위에서 물러나 화를 면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서태후는 오히려 그에게 중남해의 화방을 별장으로 하사했다.
이후 신해혁명 발발 전날, 그는 집에서 편안히 숨을 거두었다. 이처럼 재앙을 요리조리 피해간 이연영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간사한 환관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1924년 마지막 황제 부의가 자금성에서 쫓겨나고 청조가 종말을 고하면서 환관들도 평민과 다름없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 이후로 환관과 그들이 휘둘렀던 권력도 중국의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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