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정후겸의 몰락으로 시작해보자.
항상 조선왕조실록만 인용하여 포스팅했으니 이번에는 슬쩍 일성록을 인용해본다.
정조 즉위년 3월 25일의 기록이다.
대사헌 이계(李溎)가 차자를 올려 정후겸 모자의 죄를 성토하였는데, 비답을 내렸다. 차자의 대략에,
“《주역(周易)》에, ‘나라를 건설하고 집안을 계승할 때에 소인(小人)은 쓰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소인도 오히려 그러한데 더구나 난적(亂賊)이겠습니까. 오늘날의 정후겸은 요망스럽고 반역적인 심보를 가진 타고난 몹쓸 종자로서, 성사(城社)를 빙자하여 깊숙하고 엄숙한 대궐에 출몰하였고, 심지어 연희(讌喜)의 저택과 계룡(鷄龍)의 별장은 옛날에 이른바 용강(龍岡)의 침석(枕席)과 부참(符䜟)의 응험과 같다고 하여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전합니다. 우리 선대왕께서 내리신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의지하였다.’라는 전교는 신하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는데, 정후겸은 감히 시기하고 혐오하는 마음을 축적하여 항상 원망하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진 날에 예조의 직함을 띤 몸으로 거만하게도 나오지 않았고, 이번에는 하늘이 아픔을 내림으로써 일만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슬퍼하고 있는 때를 당하여서도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죄악이 아닌 것이 없지만 이것이 그중에서 더욱 드러난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현명하신 용단으로 분명하게 전형(典刑)을 내리도록 하소서.
화완옹주(和緩翁主)의 경우는 참으로 그 어미에 그 아들입니다. 원컨대, 오늘 즉시 물리치심으로써 일찌감치 감죄(勘罪)하여 조처하소서.”
하여, 비답하기를,
“지금은 수응(酬應)할 때가 아니니, 공제(公除)기간이 끝나거든 처분토록 하겠다.”
하였다. |
일성록만 보면 이렇지만 영조가 승하한 뒤 남인을 위시한 세력들이 가만 있을리가 만무하다.
이번에는 정조실록을 보자.
● 정조 즉위년 (1776) 3월 25일
이계가 아뢰기를,
“국가의 안전과 위태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감히 공제(公除)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수차(袖箚)를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적에 명종(明宗)의 대상(大喪) 때에도 공제(公除)가 지나가기 전에 상신(相臣) 이준경(李浚慶)이 간신 심통원(沈通源)을 토죄(討罪)하기를 청했었고, 인조(仁祖)의 대상 때에도 인산(因山)을 거행하기 전에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이 적신(賊臣) 김자점(金自點)을 토죄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정후겸은 곧 심통원·김자점과 같은 사람인데, 가까운 처지에서 품고 있던 흉계는 또한 심통원이나 김자점에게도 없었던 것입니다.
5,6년에서 6,7년 이래에 세도(世道)가 어지럽게 무너지고, 국세(國勢)가 위태롭게 되고, 인심이 의구심에 빠지게 된 것은 첫째도 정후겸 때문이고, 둘째도 정후겸 때문입니다.
성사(城社)에 의존하여 깊숙하고 엄숙한 대궐에 출몰하여, 일삼는 바는 몰래 임금의 뜻을 엿보는 것이었고, 임금의 총애를 의지하여 조정을 위협하고 견제하며 도모해 온 바는 몰래 국가의 권병(權柄)을 옮겨 쥐려는 것이었습니다. 장신(將臣)들을 기미(羈糜)하여 우익(羽翼)을 만들어 놓고 전선(銓選)을 맡아 보며 세력을 배치해 놓아, 사람들의 성하고 쇠함이 그의 찡그림과 웃음에서 판단되어지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무릎 밑에서 구분되어지므로, 한 부류의 환득 환실(患得患失)하는 무리들이 싹 쓸리어 앞을 다투어 붙으며 혹시라도 뒤지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심지어는 신축년과 임인년의 삼흉(三兇)들은 선대왕에게 만세의 원수가 되는 자들인데, 속이는 말로 덮으며 주선하여 관작이 복구되게 하였습니다. 연희(燕喜)의 저택과 계룡산(鷄龍山)의 전장(田庄)은 예적의 이른바 건강(乾崗)의 침석(枕席)과 부참(符讖)의 응험과 같은 것으로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전파되고 있으므로, 신명(神明)과 사람이 다같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선대왕께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의지하게 되었다.’라고 하신 하교는 신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으니, 제번하고 왕망(王莽)·조조(曹操)와 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고개를 쳐들며 추대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마는, 정후겸은 감히 시기와 혐오를 간직하고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속이고 현혹하는 말을 떠벌리어 의구(疑懼)하여 경동(驚動)하게 하고 위혐하게 핍박하는 짓을 했으니, 지난날의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져 백관들이 뜰에서 하례를 올리는 날에 춘궁(春宮)의 관직을 띤 몸으로서 완강하게 소명(召命)을 어기어 뚜렷이 대항하여 다투려는 뜻이 있었으며, 아주 가까운 지경에서 요망한 심상운을 교묘하게 부리어, 감히 어지러이 수수(授受)하게 하는 흉계를 부리고 있다가, 이번에 하늘이 아픔을 내리게 되므로 만백성이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있는데도, 갑자기 병을 핑계하며 지팡이를 집고 천천히 걸어다니는 짓을 하여 조금도 애통해 하거나 경황이 없어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은 길거리의 사람들도 모두 아는 바입니다.
시급히 정후겸의 전후의 죄악을 중외(中外)에 포고하고 분명하게 국법대로 정형(正刑)에 처하시기를 바랍니다. 화완 옹주도 그런 아들과 그런 어미이기에 온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원수로 여기는 바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실정과 처지가 그전과 달라졌기에 의심과 시기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 암암리에 꾀를 몰래 부려 어떠한 변괴를 만들어 내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또한 바라건대 즉일로 물리치어 내치고 일찌감치 감처(勘處)를 내려 궁금(宮禁)이 맑아지게 하고 넘보는 짓이 끊어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은 수응(酬應)할 수 있는 때가 아니므로 공제(公除)를 기다린 마음에 처결하겠다.”
하였다. 도승지 서호수(徐浩修) 등과 교리 정우순(鄭宇淳) 등이 계사(啓辭)와 차자(箚子)를 올려 이계의 말대로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옥당(玉堂)에서 또한 윤양후·윤태연 등이 정후겸의 혈당(血黨)이라는 이유로 우선 이배(移配)하고 천극(栫棘)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신과 삼사(三司)에서 구대(求對)하여 정후겸 모자의 죄를 시급히 바로잡기를 극력 청하니, 하교하기를,
“공손하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때라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정후겸은 멀리 귀양 보내고 옹주는 이미 사제(私第)로 나갔으므로 논할 것이 없다.”
하였다. |
결국 정후겸과 화환옹주는 정조 즉위 후 보름만에 귀양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정조는 정후겸과 홍인한 등의 처벌을 윤허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된 내용이 숱하게 많으나 대충 정조실록에 기록된 제목들만 훑어보자.
3월 25일 삼사에서 정후겸 모자의 죄를 바로잡도록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다
3월 30일 홍봉한·홍인한·정후겸을 논박하는 윤동만의 상소에 비답을 내리다
4월 03일 김상로·문녀·정후겸 모자·홍인한에 대한 백관의 토죄에 비답을 내리다
4월 15일 정후겸의 생부와 형제에 대한 엄한 처벌을 심풍지가 상소하자 비답을 내리다
5월 05일 정후겸을 가극하도록 하고 입시한 양사를 파직하도록 하다
5월 23일 홍억이 정후겸의 죄를 조목조목 밝히며 엄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비답하다
5월 25일 홍억이 정후겸을 목베고 그의 무리들을 법대로 정형하기를 상소하나 윤허않다
5월 27일 정후겸을 정법하는 일로 시임·원임 대신을 불러 보다
6월 19일 지평 이제만이 정후겸 집의 파수 김화진의 정배·정환유의 사핵을 청하다
6월 26일 행 공조 판서 박종덕 등이 상소하여 홍인한과 정후겸을 주벌하기를 청하다
6월 27일 인양군 등과 심곡 이재학 등이 상소하여 홍인한과 정후겸을 토죄하다
6월 30일 김상복 등과 유생 송헌규 등이 상소하여 홍인한과 정후겸을 토죄하다
7월 01일 김상복 등이 홍인한과 정후겸을 토죄하기를 정청하고 5차례나 아뢰나 윤허않다 |
나같으면 앞뒤가리지 않고 죄다 쓸어버릴텐데 왜 그랬을까? 라는 의문부호를 당연히 써야되지만
뭐 정조의 마음이니 일단 넘어가자.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드디어 정조 즉위년 7월 5일.
홍인한(洪麟漢)과 정후겸(鄭厚謙)에게 사사(賜死)하였다. 시임·원임 대신 및 2품 이상과 삼사(三司)의 여러 신하들이 청대(請對)하니, 흥정당(興政堂)에서 소견(召見)하였는데, 제신들이 똑같은 말로 홍인한과 정후겸 두 역적에게 시급히 처분 내리기를 극력 청하다가 소청을 윤허받지 못하게 되자 물러갔었다. 이날 밤에 임금이 또 세 시임 대신을 소견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매양 처분을 하려고 하면서도 오직 자궁(慈宮)께서 불안해 하실까 싶어 이제까지 지체하고 실현하지 못했었다. 오늘 민망스럽게 생각하고 있는 뜻으로 앙품(仰稟)했더니, 자궁께서 분부하시기를, ‘비록 사사 은정(恩情)이 앞서기는 하지만 왕법(王法)은 지극히 엄격한 것이어서 정청(庭請)하는 호소를 마침내 굴하게 할 수도 없을 것이고, 대관(臺官)들의 계사(啓辭)도 여러 날을 상지(相持)하고 있는데, 어찌 꼭 내가 불안할 것을 고려하여 국가의 사체를 손상하겠는가?’라고 하시었다. 이러하신 덕음(德音)을 받들고서 나의 뜻이 크게 정해졌으니 이제는 마땅히 처분을 내리겠다.”
하고, 하교하기를,
“통유(洞諭)하는 윤음(綸音)에 분명하게 죄악을 포유(布諭)했었거니와, 공법(公法)을 굽힐 수도 없고 여론을 막을 수도 없다. 고금도(古今島)에 가극(加棘)한 죄인 홍인한과 경원부(慶源府)에 가극한 죄인 정후겸에게 사사한다.”
하매, 영의정 김양택(金陽澤)이 말하기를,
“홍인한이 죄악에 있어서는 사사하는 율(律)은 너무 가볍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홍인한이 비록 흉악한 역적이기는 하지만 명색이 대관(大官)인데, 사사하는 이외에 다시 무슨 율로 감처(勘處)하겠는가?”
하였다. 김양택이 말하기를,
“정후겸은 또 대관이 아니니, 사사는 더욱 실형(失刑)하는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말하기를,
“결안(結案)을 받아내지 않았기 때문에 단지 사사하는 율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전에도 또한 이렇게 한 예가 있었다.”
하였다. |
그리고 이후에도 많은 대신들이 정후겸과 홍인한을노적(孥籍)하라 청하게 되지만 정조는 이 또한 쉽게 윤허하지는 않는다.
대충 어설프게 정후겸의 시작에서 끝까지 훑어보았다.
물론 더 많은 기록들이 있고 더 많은 평가가 있지만 그것까지 일일히 살펴보기에는 내 지식이 너무 적고 얄팍하다.
사실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을 살펴보기에도 벅찼다.
나름대로 주석도 달고 했지만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인지라 표현도 어색하고...
아무튼 어설프게나마 정후겸의 이야기는 이만 마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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