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는 거세된 자만이 될 수 있었다?
내시에 관한 최초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흥덕왕 원년(826) 환수'로 확인된다. 고려시대 내시는 고려중기 전까지만 해도 과거에 급제한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으나, 고려중기 이후 원나라의 환관제도를 받아들이며 거세된 남자들인 환관들로 대체됐다.
궁궐에 상주해야하는 까닭에 여성문제를 일으킬 여지를 원천적으로 없애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거세자들만이 내시가 될 수 있었다.
▶시술과정은?
우리나라엔 이 시술에 관한 기록이 없다. 원로향토사학자 김동복씨 증언에 따르면 고종 34년(1897년) 갑오경장으로 내시제도가 폐지되기 전까지 영등포쪽 용추라는 연못옆에 내시를 양산하는 움막 시술소가 있었다.
음경은 남겨놓고 고환만 제거했는데 비명소리가 새나가지 않게 주로 비오는 날 천둥번개가 칠 때 했다고 한다.
환관을 양산했던 중국에서는 시술기록을 간혹 찾을 수 있는데, 자금성 서화문 밖에 '창자'라는도자소에서 집도가 행해졌다.
정부에서 공인된 전문 시술인인 도자장이 은전 6냥을 받고 수술을 한 다음, 완치될 때까지 책임지는 곳이다. 형틀같은 곳에 사지를 묶은 후 보조시술자 3명이 허리와 두 다리를 누른 후 도자장이 예리한 칼로 한번에 남근과 고환을 모두 도려낸다.
이후 3일 정도는 물한모금 먹을 수 없다. 노폐물이 상처부분에 닿으면 염증으로 죽기 때문이다. 한달 후 붕대를 풀면 구멍만 남아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내시와 환관은 다르다?
내시와 환관은 의미 자체가 다르다. 내시는 왕의 측근에서 정무를 보는 사람을 뜻한다. 즉 성 상실과는 관련없는 관직을 이르는 말이다. 환관은 거세된 채 관직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고려 중기까지는 환관과 내시가 구분됐지만 환관들이 관리직을 차지하면서 조선에 이르러 그 뜻이 동일해졌다.
▶내시는 남근과 고환이 모두 없다?
궁형(宮刑ㆍ남근 제거형)이 없었던 우리나라에서는 자연거세(개가 어린아이의 똥을 핥다가 고추까지 잘라먹는 경우)된 이들을 내시로 선출했다. 그러나 인원이 턱없이 부족해 인위적인 거세로도 내시를 양산했다.
유계의 '시남집'에 의하면 북쪽 변경지역에 사는 주민 중에는 가난에 못이겨 부모나 본인이 스스로 거세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명주실이나 머리카락을 어린아이의 고환에 묶어놓으면 피가 통하지 않아 저절로 떨어져 나가는 방법을 썼다고 전해진다.
극중 등장하는 도자소에서는 칼로 절단하는데 이때 과다출혈과 염증, 소변구멍이 막혀 치사율이 70% 정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보통 남근은 남겨둔 채 정액을 생산하는 고환만 제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내시도 결혼생활을 했다?
극중 예종이 내시들에게 '금혼령'을 내려 이들이 양물단지를 들고 시위하는 장면이 방송됐다.
내시도 일반 사대부나 평민과 마찬가지로 아내와 자녀를 두고 결혼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성불구자였으므로 아이를 가질 수 없어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내시의 양자로는 3세 이전의 고자 아이를 데려오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내시도 성관계를 가질 수 있었다?
중국의 환관과는 달리 우리나라 내시는 고환만 없을 뿐 음경은 있었기 때문에 성관계가 가능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남성호르몬이 분비되지 않아 발기가 되지 않는 등 이 부분에 있어선 의견이 분분하다. '도구'를 이용해 부부관계를 가졌다는 설도 유력하다.
원로 향토사학자 김동복씨는 이웃집에 살던 내시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성관계가 가능한 내시들도 사정을 못하는 괴로움 때문에 아내의 목덜미와 어깨를 깨물었다고 한다.
▶내시도 출퇴근을 했다?
내시들이 궁에서 생활하다 생을 마쳤다는 상식과는 달리 그들도 일반 관료들과 마찬가지로 궁궐 밖에서 가정을 가지고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내시들의 근무형태는 궁에서 먹고 자는 장번과 출퇴근하는 출입번으로 나뉘는데 장번도 일정기간 근무하면 나갈 수 있었다.
▶내시는 수염이 없다?
고환의 정소가 제거되면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잘 되지 않아 수염이 나지 않거나 더디게 나게 된다. 따라서 거세된 내시의 경우는 남성적인 특징이 퇴화되면서 중성화돼 음성이 변하고, 수염이 빠진다.
▶내시의 양물단지엔 심벌이 들어있다?
내시들은 궁에 들어가기 위해 잘라낸 자신의 '남성'을 말려 사기그릇에 소중히 보관한다. 죽은 후 다시 접합시켜 관에 넣어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중국의 환관들은 이 양물단지를 함께 넣지 않으면 수태기능이 없는 노새로 환생한다는 속설을 믿어, 이 단지를 '보물'처럼 아꼈다고 전해진다.
▶내시의 품계와 규모는?
내시의 관직은 종2품의 상선에서 종9품의 상원까지 뒀다. 내시부의 정원은 16개 관직에 140명. 이중에서 종2품의 상선을 비롯해 상원에 이르기까지 관계(벼슬 등급)를 가진 이는 59명에 불과했다. 내시들은 대전, 왕비전, 세자궁, 빈궁 등에서 음식물 감독, 왕명의 출납, 궁궐 문지기, 궁궐 안 청소 등을 맡았다. 또 왕실 직영 잠실에 파견돼 누에를 치는 잠모를 관리하고 왕릉을 보살폈다.
왕과 나에 나오는 내시 김처선은....
영화 '왕의 남자'와 드라마 '왕과 나'에 등장하는 내시 김처선은 일곱 임금을 모신 내시로 유명하다. 세종부터 연산군까지 시대의 굴곡과 함께 한 그의 삶은 역사를 대변할 만큼 파란만장하다.
그는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 때 유배됐다가 단종 즉위후 복직했지만, 단종 3년 금성대군의 옥사에 연루돼 삭탈관직 당하고 관노로 전락했다. 세조 3년 다시 궁궐로 돌아왔고, 세조 6년 원종공신 3등에 책록됐다.성종 때는 김처선이 의술로 대비의 병을 고쳐 정2품인 자헌대부에 이를 정도로 고위 내시가 됐다.
그러나 연산군 즉위후 김처선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다. 국정은 살피지 않고 엽색행각을 벌이는 연산군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처선이 연산군에게 "이 늙은 신이 일곱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라고 직간했다.
이에 화가 난 연산군이 화살로 처선의 갈빗대를 맞추고, 김처선이 간언을 그치지 않자 다리를 자른 후 처선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명했다. 그의 혀를 뽑아 자르기도 했다. 나중에는 처선의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고 시체를 호랑이에게 먹이로 줬다.
이후 연산군은 김처선의 재산을 몰수하고 집을 연못으로 만들고 양자와 7촌의 친족도 모두 사형시킨다. 본관을 없애고, 부모의 묘를 파헤치기까지 했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김처선이 성종즉위 무렵 내시를 시작하는 걸로 나온다. 쓰 - |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