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고려시대 내시는 고자가 아니었다

zzixxa 2007. 9.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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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내시는 고자가 아니었다
고려인들의 일상 기록된 墓誌 70여점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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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시를 지낸 윤언민(1095~1154)의 묘지명.

고려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타임 캡슐’, 묘지(墓誌) 70여점이 공개된다. 고려시대 묘지가 대규모로 전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묘지는 죽은 사람의 이름, 신분, 행적 따위를 돌 등에 기록한 뒤 무덤에 묻은 것을 말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7월 11일~8월 27일, 이 박물관 역사관에서 ‘다시 보는 역사 편지-고려묘지명’ 전시회를 연다.

“내시 윤언민 7남2녀 두어”

안서대도호부사(황해도 해주 행정 총책임관)를 지낸 윤언민(1095~1154). 그는 내시도 지냈지만 7남2녀를 두었다고 묘지는 적고 있다. 고려 묘지에서는 내시가 결혼해 자제를 두었다는 표현이 자주 나타난다.
윤언민은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방을 개척했던 윤관의 아들이다.

박한남 국사편찬위 자료정보실장(내시사)은 “고려시대 내시는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의 엘리트 비서관으로 보면 된다”며 “거세된 환관과는 달리, 고려 내시는 과거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사람들이 임금을 가까이 모시기 위해 가던 엘리트 코스였다”고 했다. 거세되지 않은 사람이 내시가 되는 것은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제도. 내시가 환관과 동일시되는 것은 고려 공민왕 이후라고 박실장은 덧붙였다.

‘재혼 가정’에서 의붓자녀 교육 문제도 등장한다. 권지감찰어사(요즘 감사원 하위관료)를 지낸 이승장(1137~1191) 묘지의 한 구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자 어머니가 재혼했다. 의붓아버지는 가난 때문에 의붓아들을 공부시킬 수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내가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재혼했는데 승장을 공부시키지 못하면 무슨 낯으로 전 남편을 볼 수 있는가라고 강경하게 말했다.”

의붓자녀 교육문제도 등장

고려인들의 민족적 자부심도 엿볼 수 있다. 숙종(재위 1095~1105)의 넷째 딸 복녕궁주 왕씨의 묘지에는 “천자(天子)의 따님”이라고 적혀 있다.

문화재 관계자들은 “고려의 음악과 무용 등을 기록한 고려사악지(高麗史樂志) 속악(俗樂)편에 나오는 풍입송(風入松)에도 ‘해동(=고려)의 천자(=임금)는 지금의 제불(帝佛)이시라’라는 문장이 있다”며 “중국에 사대(事大)했기 때문에 대외적으로는 고려의 왕을 ‘천자’라고 부르지 못했지만 국내에서는 천자로 불렀던 것 같다”고 해석했다.

효자로 소문나 ‘고려사’에는 물론 ‘삼강행실도’ ‘오륜행실도’ 등에도 오른 최루백. 그는 아내 염경애(1100 ~1146)가 죽자 묘지를 직접 지어 아내를 기린 뒤 “맹세하노니 그대를 감히 잊지 못하겠다. 애통하다”고 했다. 그러나 최루백은 그 뒤 재혼해 자제를 또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고 그의 묘지는 기록하고 있다.

(※관직 해설=박용운 고려대교수(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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