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정조실록으로 알아보는 정후겸

zzixxa 2007. 10.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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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드라마 이산을 보고 있자니 정후겸이 등장을 한다. 딱 보아하니 정조대왕의 적수인 듯 하여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정후겸을 슬쩍 찾아봤더니 영조대왕 시절 엄청나게 잘나갔다만 정조대왕 즉위 후 바로 이모양이 된다.

실록의 기록일자는 정조대왕 즉위년인 1776년 3월 25일. 즉위 후 15일만의 일이다.

3월 25일(병신)  정후겸을 귀양 보내고, 윤양후·윤태연을 이배하여 천극하게 하다

정후겸(鄭厚謙)을 경원부(慶源府)에 귀양보내고, 윤양후(尹養厚)를 거제부(巨濟府)에, 윤태연(尹泰淵)을 위도(蝟島)에 이배(移配)하되, 윤양후와 윤태연은 모두 천극[각주:1]하였다.


 

정후겸은 곧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양아들인데, 홍인한(洪麟漢)·홍상간(洪相簡)·윤양후·윤태연 등과 함께 영종(英宗)이 일에 싫증을 내는 틈을 타 안팎으로 결탁하여 당여(黨與)를 배치해 놓고는 권세를 농간하고 국법을 멸시하여 온 세상을 교란시키는 짓을 하였고, 임금이 영특하고 총명함을 꺼려서 모함하고 훼방하는 말을 떠벌리어 저궁(儲宮)을 동요시키려고 음모했었다.


화완 옹주는 또한 오랫동안 금중(禁中)에서 거처하며 그의 아들을 위해 갖가지로 흉계를 도왔고, 을미년 겨울에 대리 청정(代理廳政)하라는 명이 내린 날에는, 홍인한이 세 가지의 알 필요가 없다는 말을 진언하여 기필코 큰 계책을 극력 저지하려고 하였다.

임금이 이미 청정하게 되자 또한 심상운(沈翔雲)을 불러들여 흉악한 상소를 하게 하여 번복되기를 도모하였으나 영종(英宗)의 성명(聖明)함을 힘입어 역적들의 음모가 행해지지 못하게 되었는데, 자세한 것이 《명의록(明義錄)》에 기록되어 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모든 일이 초창기였기 때문에 여러 역적들의 죄를 미처 바로잡지 못하였는데, 대사헌 이계(李溎)가 청대(請對)하자 여차(廬次)에서 소견하였다. 이계가 아뢰기를,

"국가의 안전과 위태에 관한 일에 있어서는 감히 공제[각주:2]까지 기다릴 수 없습니다."
하고, 이어 수차(袖箚)를 진달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옛적에 명종(明宗)의 대상(大喪) 때에도 공제(公除)가 지나가기 전에 상신(相臣) 이준경(李浚慶)이 간신 심통원(沈通源)을 토죄(討罪)하기를 청했었고, 인조(仁祖)의 대상 때에도 인산(因山)을 거행하기 전에 선정신 송준길(宋浚吉)이 적신(賊臣) 김자점(金自點)을 토죄하기를 청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정후겸은 곧 심통원·김자점과 같은 사람인데, 가까운 처지에서 품고 있던 흉계는 또한 심통원이나 김자점에게도 없었던 것입니다. 5,6년에서 6,7년 이래에 세도(世道)가 어지럽게 무너지고, 국세(國勢)가 위태롭게 되고, 인심이 의구심에 빠지게 된 것은 첫째도 정후겸 때문이고, 둘째도 정후겸 때문입니다.

성사(城社)에 의존하여 깊숙하고 엄숙한 대궐에 출몰하여, 일삼는 바는 몰래 임금의 뜻을 엿보는 것이었고, 임금의 총애를 의지하여 조정을 위협하고 견제하며 도모해 온 바는 몰래 국가의 권병(權柄)을 옮겨 쥐려는 것이었습니다.

장신(將臣)들을 기미(羈糜)하여 우익(羽翼)을 만들어 놓고 전선(銓選)을 맡아 보며 세력을 배치해 놓아, 사람들의 성하고 쇠함이 그의 찡그림과 웃음에서 판단되어지고 죽고 사는 것이 그의 무릎 밑에서 구분되어지므로, 한 부류의 환득 환실(患得患失)하는 무리들이 싹 쓸리어 앞을 다투어 붙으며 혹시라도 뒤지게 될까 두려워했습니다.

심지어는 신축년과 임인년의 삼흉(三兇)들은 선대왕에게 만세의 원수가 되는 자들인데, 속이는 말로 덮으며 주선하여 관작이 복구되게 하였습니다. 연희(燕喜)의 저택과 계룡산(鷄龍山)의 전장(田庄)은 예적의 이른바 건강(乾崗)의 침석(枕席)과 부참(符讖)의 응험과 같은 것으로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전파되고 있으므로, 신명(神明)과 사람이 다같이 분개하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 선대왕께서 '할아버지와 손자가 서로 의지하게 되었다.'라고 하신 하교는 신료들을 감동시킬 수 있었으니, 제번하고 왕망(王莽)·조조(曹操)와 사마의(司馬懿)·환온(桓溫)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고개를 쳐들며 추대하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마는, 정후겸은 감히 시기와 혐오를 간직하고서 항상 원망하는 마음을 품고, 속이고 현혹하는 말을 떠벌리어 의구(疑懼)하여 경동(驚動)하게 하고 위혐하게 핍박하는 짓을 했으니, 지난날의 조태구(趙泰耉)와 유봉휘(柳鳳輝)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명위(名位)가 이미 정해져 백관들이 뜰에서 하례를 올리는 날에 춘궁(春宮 예조의 별칭)의 관직을 띤 몸으로서 완강하게 소명(召命)을 어기어 뚜렷이 대항하여 다투려는 뜻이 있었으며, 아주 가까운 지경에서 요망한 심상운을 교묘하게 부리어, 감히 어지러이 수수(授受)하게 하는 흉계를 부리고 있다가, 이번에 하늘이 아픔을 내리게 되므로 만백성이 울부짖으며 가슴을 치고 있는데도, 갑자기 병을 핑계하며 지팡이를 집고 천천히 걸어다니는 짓을 하여 조금도 애통해 하거나 경황이 없어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은 길거리의 사람들도 모두 아는 바입니다.

시급히 정후겸의 전후의 죄악을 중외(中外)에 포고하고 분명하게 국법대로 정형(正刑)에 처하시기를 바랍니다. 화완 옹주도 그런 아들과 그런 어미이기에 온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원수로 여기는 바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실정과 처지가 그전과 달라졌기에 의심과 시기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 암암리에 꾀를 몰래 부려 어떠한 변괴를 만들어 내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또한 바라건대 즉일로 물리치어 내치고 일찌감치 감처(勘處)를 내려 궁금(宮禁)이 맑아지게 하고 넘보는 짓이 끊어지게 하소서."
하니, 비답하기를,

"지금은 수응(酬應)할 수 있는 때가 아니므로 공제(公除)를 기다린 마음에 처결하겠다."
하였다. 도승지 서호수(徐浩修) 등과 교리 정우순(鄭宇淳) 등이 계사(啓辭)와 차자(箚子)를 올려 이계의 말대로 따를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옥당(玉堂)에서 또한 윤양후·윤태연 등이 정후겸의 혈당(血黨)이라는 이유로 우선 이배(移配)하고 천극(栫棘)하기를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대신과 삼사(三司)에서 구대(求對)하여 정후겸 모자의 죄를 시급히 바로잡기를 극력 청하니, 하교하기를,

"공손하게 입을 다물고 있어야 하는 때라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정후겸은 멀리 귀양 보내고 옹주는 이미 사제(私第)로 나갔으므로 논할 것이 없다." 하였다. 같은 해 7월 5일 정후겸은 홍인한과 같이 사사된다.

한 때의 권력이 천년 만년 유지될 것이라고 믿는 어리석음이 결국은 죽음으로 이르게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던 홍국영도 결국은 그렇게 되는 걸 보면 ...... 욕심, 비단 권력 뿐만이 아니라 재물 등 많은 부분에 대한 욕심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많은 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권력자들이 벌이는 행태는 도대체 뭔지...ㅉ

  
         

 

  1. 천극 : 귀양살이하는 중죄인의 거처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제한하는 일 [본문으로]
  2. 공제 : 임금이나 왕비가 죽은 뒤 일반 공무를 중지하고 26일 동안 조의를 표하던 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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