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는 진평왕의 딸인가? 백제 호족의 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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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은 선화공주(통념상 그렇게 말하겠습니다)의 요청에 의해 지금의 익산에 미륵사 또는 '왕이 흥하는 가람'이란 뜻의 왕흥사(王興寺)를 짓기 시작했다. 미륵사는 미륵불을 모실 도량이었다.
이는 곧 현재의 왕이 전륜성왕이고 무왕이 정법으로 다스리는 낙토가 백제라는 뜻이었으니 무왕으로서는 익산에 거래한 미륵사를 세우려는 왕비의 계획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중국사료들은 백제의 대성8족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그중 <수서(隨書)> 백제조를 보면
그러나 <삼국사기>는 그 아버지가 못 속의 용이 아니라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사료를 종합해 보면 서동은 백제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실의 권위가 극도로 약화된 사비시절인지라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를 팔아 살아야 했던 불우한 왕족 서동이 끝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선화공주와의 결혼이었다.<삼국유사>에 실린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그런데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었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극도의 증오심이 수반된 전쟁 중에 있었다. 이 전쟁은 한강 유역 확보라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국가의 이익을 둘러싼 싸움이자 선왕의 죽음과 복수라는 의리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백제 왕실에게 신라 왕실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백제 왕실이 백제의 토착 호족들에게 맥 못추고 휘둘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신라 임금 진흥왕의 배신 때문이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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