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사대유학자 포은 정몽주

zzixxa 2007. 7.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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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 유학자 정몽주!

이색과 더불어 대유학자로써 우리에게는 고려 말의 충신으로 알려진 성리학의 대가이다.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라고 불렀고 벼슬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와 대사성(大司成)을 거처 좌명공신(佐命功臣)까지 오른 사람이다.

그는 우왕(禑王)에게 올린 절원귀명(絶元歸明)의 상주문에서

 

“대명나라가 창업하여 사해를 휩싸매 우리 돌아가신 임금(공민왕)께서 천명을 밝히 아시어 표문을 바치시고 신이라 일컫었으니, 명나라 황제가 아름답게 여겨 왕작(王爵)을 봉하고 선물을 내리시어 서로 바라보기가 6년입니다.

금상(今上)인 우왕께서 직위하신 처음에 적신(賊臣) 김의(金儀)가 천사(天使)를 애송하다가 제 마음대로 죽이고 돌이켜 북원으로 들어가 원나라 유민들과 더불어 심왕(瀋王)에게 몸을 맡기기를 꾀하였사오니, 이일은 천사(天使)를 죽이고 또 임금을 저버리는 것이므로 흉악한 역적 짓이었습니다.”
 
포은 정몽주는 동방이학의 시조라 불리울 정도로 송학을 대성한 사람으로 고려말기 30년간이나 권좌에 앉아 있으며 조정을 보살핀 인물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학식이 높고 중요한 자리에 있었던 한나라의 지도자가 공민왕이 명나라태조에게 신(臣)이라 칭한 것을 옳다고 보았다.

명나라는 건국한지 오래되지 아니하여 국가기강이 튼튼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명나라의 강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진하여 신하가 되기를 요청한 것이다.

명나라를 세운 명 태조는 비천한 유민출신으로 성질이 잔인하여 후일 부하 8만 여명을 주살하였고 영토확장의지가 강하여 군왕으로써 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나라가 유교문화의 종주국이라는 것과 한(漢)족 국가라는 데서 정몽주는 우리 스스로 오랑캐라고 낮추고 명나라 사신을 천사(天使)라고 부르면서 명나라에게 귀부(歸附)하기를 요청하였으니 포은 정몽주야 말로 사대모화의 시조인 것이다.


정몽주의 충성심은 알겠으나...

물론 정몽주는 태종 이 방원과 주연석상에서 읊은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건 없건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노래는 포은 정몽주의 절의사상(節義思想)과 충성심을 잘 나타 낸 것은 틀림이 없다.

또, 고려 말 내정에 있어서도 괄목한 업적을 남겼고, 외교 분야에서도 공적을 남겨 이학자로써 만인의 존경을 받았으나, 포은 정몽주가 이 나라를 명나라의 정신적인 노예로 팔아 넘긴 것은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사대사상이나 모화사상은 신라의 삼국통일과 더불어 싹트기 시작하여 고려 말부터는 농도가 짙어진다. 사대사상은 우리조상들이 중국을 세계최대의 강국이자 최고의 문명국으로 보고 중국과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는 굴욕감에서 나왔지만, 그 도가 너무 지나쳐서 마치 창부(娼婦)와 같이 중국에 갖은 교태를 부리며 스스로 미천한 약소민족으로 비하했다.

사대사상이 극을 이룬 조선조에는 중국과 군신의 관계 혹은 부자지간을 비교하고, 중국 조정을 천조라 불렀고 중국의 사신을 천사라 불렀다. 또, 중국의 장수를 천장, 중국의 땅을 신주(神州)로 불렀고 중국을 상국으로 부르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동북공정이 진행되어 역사왜곡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어쩌면 이조 5백년동안 정신적 이념으로 지배해온 사대모화사상인 성리학의 숭배로부터 볼 수 있다. 많은 대학자들을 배출하여 사상적인 정립을 이루었다고 자부하는 성리학이 우리 민족에게는 가장 치욕적인 사대모화사상을 제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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