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왕비 탈락자는 모두 후궁이 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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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비나 세자빈 등 국모(國母)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다 떨어진 양반가 규수들은 과연 모두 국왕의 후궁이 됐을까. 그간 학계는 국왕의 배필이 되기위해 나선 십여명의 처자 중 왕비로 낙점받은 1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후궁이 돼 평생 성은(聖恩)만을 바라는 처녀로 늙었다고 봤다. 과부의 재혼 금지나 수절 등 종법과 가부장적 유교이념이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왕실은 특히 내외법에 의한 행동규제를 더욱 강조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다.
간택 과정에서 탈락한 처자들도 왕이 아닌 다른 유력가문 자제에게 시집을 갔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소장 역사연구자인 이미선씨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이 펴낸 ‘정신문화연구 2007 여름호’에 기고한 ‘1681년 국왕 가례시 간택처자 연구’라는 논문에서 최종 선발된 여흥민씨 민유중의 딸(훗날 인현왕후)을 제외한 나머지 후보들 역시 모두 결혼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5일 주장했다. 숙종이 임금 자리에 오른지 7년되던 해인 1681년 조선 팔도에 금혼령이 떨어졌다. 왕비를 뽑기 위해서였다. 총 15가문 18집안의 처자가 1·2·3차 간택을 거쳤다가 인현왕후에게 밀렸다. 가문별로 살펴보면 풍양조씨·번남박씨·파평윤씨에서 2명, 진주강씨, 창녕조씨, 안동권씨, 해평윤씨, 밀양박씨, 죽산안씨, 온양정씨, 광주안씨, 진주유씨, 전주최씨, 남양홍씨, 청송심씨였다. 모두 조선 초기부터 국왕의 외척 세력이나 훈공 등을 통해 왕실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며 지속적으로 고위관료를 배출해온 당대 최고 명문대가였다. 이씨는 이들 집안 족보를 통해 당시 간택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15∼19세(1663∼67년생)의 딸들을 추적한 결과 이들이 숙종이 아닌, 다른 명문대가 자제들과 결혼을 했다고 주장했다. 또 간택에 참여했던 사실은 훗날 혼사에도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다고 이씨는 강조했다. 이들 가문이 워낙 ‘빵빵’해 사돈 인연을 맺으려는 집안이 줄을 이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적어도 숙종 간택에 올랐던 후보들은 모두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갔다”면서 “낙선한 처자들이 다른 곳으로 시집갈 수 없다거나 왕의 후궁으로 들어갔다는 설은 종법과 가부장권이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내외법은 왕비 후보들에게 더욱 가혹했을 것이라는 그릇된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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