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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양녕대군)가 곽선의 첩 어리를 간통하여 궁중에 들여온 사건 기사

zzixxa 2008.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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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종 17년 2월 15일 세자가 곽선의 첩 어리를 간통하여 궁중에 들여온 사건 기사


명하여 전 판관(判官) 이승(李昇)·전 소윤(小尹) 권보(權堡)·악공(樂工) 이법화(李法華)·환자(宦者) 김기(金奇) 등을 의금부에 가두게 하였다. 

처음에 악공 이오방(李五方)이 몰래 동궁(東宮)에 들어가 전 중추(中樞) 곽선(郭璇)의 첩 어리(於里)의 자색(姿色)과 재예(才藝)가 모두 뛰어났다고 칭찬하니, 세자가 즉시 이오방으로 하여금 그를 도모하게 하였다. 
(이쁘다니까 그냥 넘어가서 곧바로 어찌해볼 생각을 하는군요.)

이오방이 이에 그 무리 홍만(洪萬)과 더불어 곽선의 생질녀의 남편 권보(權堡)에게 청하니, 권보가 말하기를,
“곽선은 나와 인친(姻親)의 은혜가 있어 속일 수 없다. 그러나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느냐?”
하고, 그의 첩 계지(桂枝)를 시켜 어리(於里)에게 말하였으나, 어리가 응하지 아니하였다. 
(윗전에서의 압력때문이라는 핑계를 대고 다리를 놓은 권보보다는 따르지 않는 어리가 낫습니다. 쩝)

이법화가 세자에게 고(告)하기를,
“신물(信物)을 보내느니만 같지 못합니다.”
하여, 즉시 소환(小宦)을 시켜 수낭(繡囊)을 보내었으나, 어리가 사양하는데 억지로 두고 돌아왔다. 
어리가 이 일을 곽선의 양자(養子) 이승(李昇)에게 알리고 그대로 그 집에서 유숙하였다. 
(어리가 감당이 안될 것 같으니까 그래도 믿을만하여 이승에게 일렀습니다만...)

이법화가 달려가 세자에게 고하기를,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하자, 세자가 소수(小竪)를 거느리고 대궐 담을 넘어 도보로 이오방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이승의 집에 이르렀다.(그래도 거리낌은 있었는지 대문으로는 나가지 않고 담을 넘네요.. 쩝)

어리를 찾으니, 이승이 듣지 않으므로 그에게 강요한 뒤에야 만나게 되었다. 드디어 어리와 함께 이법화의 집에 가서 자고, 그를 궁중(宮中)으로 납치(納置)한 다음, 세자가 활[弓]을 이승에게 보내고, 어리도 또한 비단을 이승의 처에게 보냈으나, 이승은 활만 받고 비단은 받지 아니하였다. 
(지금껏 말을 듣지않은 어리가 쉽게 잠자리를 했을까요? 이런 상황이 강간이라는 말을 나돌게 했습니다. 
더군다나 궁중으로 데려갔으니 강간,납치의 파렴치한 범죄가 돼버렸습니다.) 


임금에게 계문(啓聞)하고자 하니, 세자가 사람을 시켜 힐난하기를,
“너는 나의 한 일을 헌부(憲府)나 형조(刑曹)에 고하려 하는가? 이 일을 어디에 고할 것인가?”
하여, 이승이 두려워서 계문하지 못하였다. 
(죄를 보고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전형적인 권력형 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마침 전별감(殿別監) 소근동(小斤同)은 본래 김한로(金漢老)의 가노(家奴)인데 수사비(水賜婢 무수리의 몸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와 서로 희롱하였으므로 김한로가 이를 알고 임금에게 아뢰기를,
“소근동(小斤同)은 범한 것이 있으니, 청컨대, 그 죄를 물으소서.”
하였다. 

임금이 내관(內官) 최한(崔閑)에게 명하여 심문하게 하였더니, 소근동이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어리(於里)의 일을 가지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를 듣고 대노(大怒)하여 즉시 이승(李昇)을 불러 그 연유를 물었더니, 이승이 고하였다.

“작년 섣달에 신(臣)이 가족을 거느리고 곽선(郭璇)이 사는 적성현(積城縣)에서 서울로 돌아올 때, 어리가 서울[京中]에 사는 족친(族親)을 보고 싶다고 말하니, 곽선이 이를 허락하므로 즉시 신과 함께 왔었습니다. 

며칠 있다가 신더러 말하기를, 
‘근자에 기이한 일이 있다. 계지(桂枝)가 처음에는, 「효령 대군(孝寧大君)이 너를 보고자 한다.」말하더니, 나중에는 「세자가 너를 보고자 한다.」고 말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본래 병이 있고 얼굴도 예쁘지 않은데다 더욱이 지금은 남편이 있는데 그것이 무슨 말인가?」고 하였다.’ 하였으므로, 신이 놀라서 여종[婢]을 시켜 권보(權堡)의 집으로 가서 계지가 중매한 일을 말하게 하였더니, 권보가 대답하기를, ‘근일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아 아직 그 행방을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날이 저물어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기에 종[奴]을 불러 내다보게 하였더니, 바로 환관(宦官) 김기(金奇)이었습니다. 김기가 말하기를, ‘세자께서도 오셨다.’ 하기에, 신이 이를 듣고 황급하게 의관을 차리고 나가 뵙고 엎드렸더니, 세자께서 말씀하기를, ‘빨리 어리를 내라.’ 하시므로, 제가 부득이 그 말을 좇았습니다만, 세자께서 데리고 가신 그 뒤로는 신도 그가 간 곳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같은 큰 일을 어째서 계문(啓聞)하지 않았느냐?”
하니, 이승이 대답하기를,

“처음에 계문하고자 하였으나, 권보가 와서 말리면서 말하기를, ‘네가 계달(啓達)하는 것은 속담에 이른바, 누이 주고 형께 호소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기에, 신이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여 즉시 계달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조말생에게 명하여, 이승에게 편(鞭 가죽채찍) 1백 대를 때리고 그 직첩(職牒)을 거두게 하였다. 또 권보를 소환하여 이를 물었더니, 숨기고 고하지 아니하므로 모두 의금부(義禁府)에 내리고, 참찬(參贊) 윤향(尹向)·우부대언(右副代言) 목진공(睦進恭)과 형조·대간(臺諫)에 명하여 잡치(雜治)하게 하였다

잡치(雜治)

잡치(雜治)는 나라에서 중죄인(重罪人)을 심문할 때 대간(臺諫)·형조(刑曹)의 관원이 합동으로 신문하는 일인데 이때 위관(委官)은 임금이 임시로 임명하였다고 합니다.


지사(知事) 김사문(金士文)을 공주(公主)로 보내어 이오방(李五方)을 잡아 오게 하고, 도사(都事) 양질(楊秩)을 경성(鏡城)에 보내어 구종수(具宗秀)를 잡아 오게 하였다. 삼군 진무(三軍鎭撫) 인인경(印仁敬)을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하니, 인인경은 동궁문(東宮門)을 파수함에 조심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의정부·육조(六曹)·대간에 명하여, 권보(權堡)·이승·이오방·이법화의 죄를 의논하게 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뒤의 사람들이 만약 세자에게 향복(享福)하게 하고자 했다면 어찌 이런 일을 함에 이르렀겠습니까? 이는 세자로 하여금 불의(不義)에 빠지게 한 것이니, 반역(叛逆)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또 전하께서 세자가 착한 일을 하도록 하신 뜻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세자의 일시적 쾌락만을 얻게 하려고 했으니, 그들이 주상께 불충함도 또한 분명하니, 청컨대, 율(律)을 따라 시행함으로써 뒤에 오는 사람을 경계하소서. 세자의 전후(前後)·좌우(左右)가 모두 정직한 사람이라면 세자께서 족히 천선개과(遷善改過)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경 등의 말은 옛사람의 언론과 다름이 없다.”
여러 신하가 모두 나가는데, 임금이 조말생과 이원(李原)을 머물게 하여 말하기를,
“세자의 행실이 이같으니, 태갑(太甲)을 내쫓던 고사(古事)를 본받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이원이 대답하기를,
“명하신 말씀은 옳으나, 세자께서는 본래 천질(天質)이 아름다우니 만약 봉영(逢迎)하는 자들을 제거하고 정직한 사람을 골라 가르치게 한다면, 앞으로 반드시 허물을 고치고 착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태갑(太甲)을 내쫓던 고사(古事)

성탕(成湯)의 손자인 태정(太丁:은(殷)의 제2대 왕 태종(太宗))이 즉위하여 3년간 포학 방탕하였으므로 이윤(伊尹)의 내침을 받았다가 3년 뒤에 개과하고 다시 돌아와 선정을 베풀었다는 고사(故事)를 말함인데 이때부터 태종의 마음속에서 양녕대군이 슬슬 떠나기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사인(舍人) 심도원(沈道源)을 박은(朴訔)의 사제(私第)에 보내어, 이승 등의 죄를 의논하기를,
“구종수는 율(律)에 따라 처단함이 가하지만, 이승과 권보 같은 자는 국론(國論)이 모두 ‘참(斬)함이 가하다.’고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박은이 말하기를,

“신이 그전에 구종수를 논할 때, 신이 죄를 청했던 것이 본래 그와 같았습니다. 만약 신의 말을 좇아 일찍 구종수를 참(斬)하였다면 반드시 오늘과 같은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신이 이르기를, ‘이승 등의 마음에는 주상이 없다.’고 했는데, 주상이 없다는 것은 대역(大逆)이요, 저부(儲副 양녕대군)를 혼란에 이끌어 넣어 나라의 근본을 그르치고 사직(社稷)을 위태롭게 하려고 꾀하는 것입니다. 주상께서 반드시 신의 말을 지나치다 할 것이나, 신 등의 생각으로는 능지 처사(凌遲處死)하더라도 가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므로, 심도원(沈道源)이 이로써 아뢰니, 임금이,

“그럴 줄 알았다.”
하였다. 빈객(賓客) 변계량(卞季良)·이맹균(李孟畇)·탁신(卓愼) 등이 아뢰기를,
“세자를 이렇게 되게 한 것은 실상 신 등이 능히 교도(敎導)하지 못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세자께서 그전에 구종수(具宗秀)를 치죄(治罪)할 때에 신 등과 더불어 말하기를, ‘내 이제부터는 반드시 이런 일들은 하지 않겠다. 만약 개전(改悛)하지 아니하고 다시 전철(前轍)을 밟는다면 성상께서 비록 부자(父子)의 지은(至恩)이라 하여 즉시 죄를 가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하늘이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하였으므로, 신 등이 이 말을 듣고 스스로 경계하는 말이라 기록하여 서연청(書筵廳)의 벽에 붙여 두었는데, 어찌 오늘날의 일이 또 이에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신 등은 황송해 하는 것이니, 신 등이 진실로 원함은 이런 무리들을 대의(大義)로 처단함으로써 뒷사람을 경계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경 등의 죄가 아니다. 내가 아비이면서도 능히 의방(義方)으로 가르치지 못하였는데 하물며 경 등이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그 실상을 말하면 경 등의 과실도 아니요, 또한 내 과실도 아니다.”
하고, 이어서 전지(傳旨)하기를,

“옛날에 이윤(伊尹)은 신하이나 태갑(太甲)을 동궁(桐宮)에 거처하게 하여 인(仁)에 처하고 의(義)에 옮기게 하였으니, 태갑은 능히 고친 자라 하겠지만 세자는 고치지 못한 자라 하겠다.”
하였다. 변계량 등이 말하기를,

“신 등은 성상께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단지 원함은 세자께서 사리(事理)에 통하시어 마음을 평정(平正)하게 세워 전하에게 지극히 효도하실 줄만 알았지 어찌 이 같은데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실로 신 등이 능히 교도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니, 신 등의 죄는 형언할 수 없습니다.”
하니, 변계량에게 전교(傳敎)하기를,

“예전에 내가 임실(任實)로 갈 때 경은 세자가 정성(定省)을 오래 궐하게 될 것을 말하면서 눈물까지 흘렸으니,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경의 말을 듣고 고인(古人)이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도리가 있다고 했더니, 어찌하여 하늘에 맹세하기를, ‘행실을 고친다.’ 하고서 겨우 2순(旬)도 넘지 못하여 다시 전철(前轍)을 밟는다는 말인가?”
하였다. 변계량(卞季良) 등이,

“세자께서는 천자(天資)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니 고치기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 같은 무리를 제거하신다면 일조(一朝)에 천선개과(遷善改過)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태조(太祖)께서 성신문무(聖神文武)하신 것은 경 등이 아는 바이나, 지금 세자는 한 가지도 없으니 어떻게 조선 만세(朝鮮萬世)의 치욕을 씻을 것인가? 내가 태조의 일을 말함은 이유가 있어서이다.”
하였다. 변계량이 말하기를,

“신 등은 이미 상교(上敎)를 알고 있습니다. 태조께서 재덕(才德)이 겸전하셨던 것을 조선의 신자(臣子)로서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우부우부(愚夫愚婦)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하매, 목진공(睦進恭)이 아뢰었다.

“이법화(李法華)가 말하기를, ‘전년 정월에 세자께서 밤을 타서 구종수의 집에 이르러 저를 부르기에 제가 이오방과 함께 갔었는데, 뒤이어 상기(上妓) 초궁장(楚宮粧)이 와서 노래하니, 저더러는 금(琴)을 타게 하고, 이오방에게는 피리[笛]를 불게 하여 밤을 새다가 새벽에 이르러서야 초궁장을 끼고 궁중으로 들어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이보다 앞서 세자가 음률을 좋아하니, 영인(伶人) 이오방과 이법화 등이 날마다 음벽(淫僻)한 일로 유인하였고, 구종수도 서로 표리(表裏)가 되어 세자와 함께 몰래 강변에서 놀기도 하고, 혹은 밤에 구종수의 집에 가서 유숙하였는데, 초궁장이 다 따라 다녔었다. 이때에 이르러 본역(本役)에 따라 정역(定役)하니, 초궁장은 황주(黃州) 기생이었다.

여기에서 초궁장이 한 번 더 거론되네요.
제가 주저리주저리 나불거리는 것 보다는 왕조실록을 그대로 옮겨서 보여드리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서 덜컥 태종실록을 옮겨놓고 몇마디 거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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