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정후겸의 숙적 홍국영 2

zzixxa 2008. 1.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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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국영이 조선왕조실록에 첫 선을 보이는 것은 영조49년 4월 5일입니다.

▣ 영조 49년 4월 5일(1773년)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의 동월대(東月臺)에 나아가 친히 하향 대제(夏享大祭)의 의식을 익혔다. 한림(翰林)과 주서(注書)의 소시(召試)를 행하여 한림에는 정민시(鄭民始)와 홍국영(洪國榮) 등 4인을 뽑고, 주서에는 신사오(申史澳) 등 3인을 뽑았다.

1771년에 병과에 급제하여 1773년에 한림이 되었으니 그 동안 홍국영은 그저 별 볼일 없는 벼슬아치중에 하나였던 모양입니다. 정후겸은 왕조실록이 닳도록 뻔질나게 나타났다 사라졌다하는데 홍국영은 조용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한림이 되었다고 홍국영이 그다지 잘나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정조 이산의 두뇌노릇을 하면서 막후로야 어떤 영향력을 미쳤는지는 모르지만 왕조실록으로 보기에는 그렇다는 것이죠. 그런데 홍국영이 왕조실록에 두번째 나타날 때는 제법 위력을 과시합니다.

▣ 영조 49년 9월 20일(1773년)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서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에게 입시(入侍)하기를 명하였다. 이경양(李敬養)·이상암(李商巖)을 잡아들이고 하교하기를,
“네가 신하가 되어 직숙(直宿)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이것이 역심(逆心)이 아니냐?”
하니, 이경양 등이 대답하기를,
“직숙을 정지하기를 청한 것이 아니라, 제신(諸臣)을 억누른다는 하교를 환수하기를 감히 청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비록 듣는 것이 밝지 못하나, 한림(翰林)은 귀가 밝다.”
하고, 곧 한림에게 물으니, 한림 홍국영(洪國榮)이 자세히 듣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사관(史官)이 듣지 못하였는데 네가 어찌 감히 지척에서 기망(欺罔)하느냐?”
하고, 곧 각각 형추(刑推)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거짓으로 명예를 탐하여 구하였다[釣名]고 지만(遲晩)하는 것이 가하다.”
하니, 영의정 김상복(金相福)이 말하기를,
“이는 거짓으로 명예를 탐하여 구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김상복을 삭직(削職)하고, 두 사람을 지만하게 하였다.
(후략)

애시당초에 영조의 마음에 벌할 것을 작정하고 나선 일이겠지만 홍국영이 자세히 듣지 못하였다.. 라고 말한 순간 두 사람은 어둠의 골목을 헤메고 맙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홍국영이 뭔가를 꾸미거나 이루는 것은 없어보입니다. 하긴 아직 나이도 어리고 갈 길은 KTX를 타고 달나라까지 갈 만큼 멀리남았으니까요.

결국에 가서는 권력이 주는 독배를 마시고 말지만 이제 시작하는 홍국영은 권력이 주는 독배를 마실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도 않았고 아니다 싶은 일을 억지로 하는 눈치보기 등의 행태도 없었던 모양입니다. 뭐 이런게 신입사원의 위력이자 장점아닐까요.

홍국영의 초반 성격을 대충 가늠할 수 있는 왕조실록 하나 인용하고 다음 번을 기약해봅니다.
그 날이 올런지.... 쩝.

▣ 영조 51년 12월 25일(1775년)

부응교 홍국영(洪國榮)이 상서하기를,
“신과 판부사 신 홍인한(洪麟漢)과는 동성(同姓)의 지친으로 10촌 족조(族祖)가 됩니다. 방금 삼사가 일제히 일어나 죄를 성토함이 지엄한데, 신은 사의(私義) 때문에 감히 여러 신하들의 뒤를 따라 참여하여 마치 남인 것처럼 하지 못했습니다. 이에 소패(召牌)가 내려도 어기는 것을 면치 못하였는데, 신이 면직을 비는 글에서 어찌 감히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아! 대조의 지극히 자애하신 덕으로 저하께 3백 년의 중한 종사(宗社)를 부탁하셨으니, 저하의 오늘날 급선무는 우리 대조께서 50년 동안 조제(調劑)해 오신 고심(苦心)을 우러러 본받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일 이래로 풍색(風色)이 격렬해지고 상소가 빗발치듯 하며 혹은 중도를 지나침이 있어서 재택(裁擇)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이렇게 하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그칠 기약이 없고 편안하고 조용할 때가 없을 것입니다.

아! 팔도의 백성들이 우러러 받드는 것은 오로지 대조(大朝)와 저하(邸下)일 뿐이니, 무릇 혈기가 있는 무리라면 어찌 다른 마음을 갖겠습니까? 만약 오늘날의 신하로서 혹 그런 죄를 짓는 자가 있다면 주벌(誅罰)해야 하며, 오늘날 말하는 자 가운데 혹 그 실정에 지나친 말을 하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살펴 헤아려야 합니다. 하물며 저하의 처음 하시는 정사가 지극히 공정(公正)한 도리에 힘쓰시니,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미진한 탄식이 있겠습니까?

신이 여러 해 동안 강독(講讀)을 하여 치우치게 지우(知遇)해 주신 은혜를 입어서 매양 주연(胄筵)에 올라서 구구하게 앙달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세신(世臣)을 보전하고 세도(世道)를 안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저하께서도 역시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신의 한결같이 굳은 적성(赤誠)은 곧 나라를 위한 것이지,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마침 논사(論思)하는 직임을 맡아서 저하를 위해서 다시 한마디 올리지 않는다면 신이 은혜를 저버린 죄를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내가 너와 지우(知遇)하고 너와 뜻이 맞은 것은 서연(書筵)에서부터였는데, 잠경(箴警)과 자익(資益)이 어느 것 하나 지우와 뜻에 맞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너에게 허여한 것은 별도로 있었다. 너의 성의가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것에 감동하였고, 너의 공심(公心)이 조금도 굽히지 않은 것을 가상(嘉尙)히 여겼다.

바야흐로 이제 조정의 기상이 분분할 때에 이처럼 대증(對症)할 좋은 경계의 말을 올렸으니, 촛불을 밝히고 읽으면서 더욱 참으로 감탄하였다. 세신을 보전하고 세도를 안정시키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비단 시무(時務)의 절요(切要)일 뿐만이 아니니, 내가 이로써 지켜나갈 자료로 삼겠다. 그리고 상서 중 인의(引義)한 것은 지나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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