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정후겸의 숙적 홍국영 1

zzixxa 2008.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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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설프게나마 정후겸을 끝냈으니 이번에 홍국영에 대해서 슬슬 시작하고자 합니다. 역시나 특별한 지식이 없으니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 등을 참고로 조금씩 진행해봅니다.

일단 홍국영에 대해서 대략적인 것은 알아야 겠기에 네이버, 다음, 엠파스의 백과사전을 뒤져서 조금씩 짜집기해봤습니다.

홍국영(洪國榮)

1748(영조 24)∼1781(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덕로(德老).

관찰사 창한(昌漢)의 손자이며, 판돈녕부사 낙춘(樂春)의 아들이다.

큰아버지는 낙순(樂純)이며, 정조의 외조부인 우의정 홍봉한(洪鳳漢)과 이조판서 홍인한(洪麟漢)은 가까운 집안이었으나 그의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못하였다.

1771년(영조 48)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설서가 되었다.

이때 마침 영조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고 그 소생인 손자(뒤의 정조)를 후계로 정하였다.

영조 말년 벽파의 횡포 속에서 세손을 보호한 공로로 세손의 두터운 총애와 신임을 얻게 되었다.

이어 사서에 승진하였고, 이때 세손의 승명대리(承命代理)를 반대하던 벽파 정후겸(鄭厚謙)·홍인한·김귀주(金龜柱) 등을 탄핵하여 실각시키고, 1776년 홍상간(洪相簡)·홍인한·윤양로(尹養老) 등이 세손을 반대, 모해하려는 모역을 적발하여 처형시켰다.

그해 정조가 즉위하자 곧 동부승지로 특진 임명되었고, 날랜 군사를 뽑아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여 숙위대장을 겸직하여 왕궁호위를 전담하고 도승지에 올랐다.

실권을 잡게 되자 삼사(三司)의 소계(疏啓), 팔로(八路)의 장첩(狀牒), 묘염(廟剡), 전랑(銓郎)의 차제(差除) 등을 모두 총람(總覽)하였고, 또 당시의 삼공육경(三公六卿)까지도 그에게 맹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세도정권이 이루어져 갖은 횡포와 전횡을 일삼아 정후겸 못지않다 하여 대후겸(大厚謙)이라 불렸다.

정조의 두터운 신임에 힘입어 자연히 조정의 백관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도 그의 말이라면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을 얻어야 행동하게 되므로 ‘세도(勢道)’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1778년(정조 2)에는 누이동생을 후궁으로 바쳐 원빈(元嬪)으로 삼게 하여 정권을 굳게 다졌다. 그러나 원빈이 1년 만에 죽자 김시묵(金時默)의 딸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의심하여 핍박함으로써 왕실세력의 미움을 받았으며, 은언군(恩彦君)의 아들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에 봉하고, 다시 상계군(常溪君)으로 개봉하여 세자로 책봉시키려다가 여의치 않자 모반죄로 몰아 제거하는 등 세도정권의 유지에 급급했다.

왕비 순정왕후(純貞王后)가 원빈을 살해한 것으로 믿고 왕비를 독살하기 위하여 1780년에 독약을 탄 음식을 왕비전에 넣었다가 발각되어, 집권 4년 만에 정민시·서명선·유언호(兪彦鎬)·김종수 등의 탄핵을 받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강릉(江陵)으로 추방되었다. 고향에 내려와 울화를 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중 병을 34세로 병사했다.

실각할 때까지 도승지로 이조참의·대제학·이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일설에는 자진해서 물러가라는 정조의 권고로 일시 은퇴하였다가 삼사의 탄핵으로 형벌을 받았다고도 한다.

송시열(宋時烈)의 후손인 송덕상(宋德相), 민우수(閔遇洙)의 문인 김종후(金鍾厚) 등의 지원을 받아 노론 청류(淸流)를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했으나, 전횡을 일삼고 나아가 스스로 외척이 되어 독주함으로써 여타 외척세력 및 노론·소론·남인 모두와 대립했다. 특히 정조의 준론탕평책(峻論蕩平策) 구상 추진에 장애가 되면서 제거되었다.


다음부터는 본격적으로 왕조실록을 뒤져보겠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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