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양녕대군은 고뇌에 찬 왕세자인가? 아니면 양아치인가?

zzixxa 2008. 1.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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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양녕대군이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형님이고 일찍이 아우인 충녕대군의 총명함을 알아 스스로 세자 자리를 물러나고 둘째 아우인 효령 대군이 왕위에 대한 미련을 가지자 충녕의 총명함을 깨우쳐 신흥 왕조 조선의 토대를 굳게 다지는 의미에서 총명한 충녕대군에게 보위를 잊게하여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과연 이게 사실이까? 양녕대군에 대한 이러한 이미지는 월탄 박종화님의 견해가 주로 작용했다. 박종화님에 의해 양녕대군의 선견지명이 두드러져 보이고 그를 이은 세종대왕의 업적으로 인해 양녕대군의 결단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양녕대군의 행적을 살펴보면 진실로 그의 의도가 그러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많이 있다.

양녕대군의 어린 시절과 사건들!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11살인 1404년에 왕세자로 책봉을 받게된다. 그러나 1418년 폐세자가 되어 궐밖으로 내쳐지고 동생인 충녕이 왕이된다.


이 14년간의 그의 행적은 어떠했을까? 어떠했길래 이미 결정된 왕세자 자리를 태종이 빼앗게 되었을까? 그는 과연 아우인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일부러 미친척하고 사고를 쳐서 태종에게 밉보이도록 노력을 의도적으로 했던 것일까?


양녕은 출생해서 여러 사건을 접하면서 유년 시절에 충격적인 일을 많이 당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선 태종의 등극과 관련한 무수한 살상행위가 있었고,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와 아버지 이방원의 갈등도 보았으며, 유년 시절 그와 같이 살았던 외가댁의 외숙부 4명이 모두 태종에 의해 살해되는 것도 보았으며, 어머니인 민씨 또한 태종에 버림받아 사실상 홀로 사는 것도 보았다.


이 모든 사건은 유년기에 겪기에는 벅찬 사건들임에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그의 행위에 영항을 끼쳐 권력이나 왕위에 거부감을 갖게 했다는 설명 또한 설득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타 다른 형제들도 겪었던 사건에 대한 반응치고는 그의 태도는 확연히 구별된다.

과연 일부러 광인 행세를 해서 왕위를 물려주려했을까?


불량청소년에서 시정잡배로

세자시절 그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소위 현재 말하는 불량 청소년의 행위란 행위는 다하고 있다. 공부는 뒷전이고 여색을 탐하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해 궁궐담을 뛰어 넘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고 어울리는 부류로는 雜人이 많다고 기록에 나오는데 이들을 궁궐로 끌어들여 진탕 놀기도 하여, 태종이 노하여 세자의 거처를 태종 바로 곁으로 옮기기 조차했는데도 그의 기행은 그치지 않았다.


그의 기행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여자 문제였는데 오늘날로 치면 그 난삽함이 이루 말로 다하지 못할 정도였다. 기생들과 난삽하게 노는 것은 그만두고서라도 정종의 여인인 초궁장이란 여인을 취하였으며, 고위 관직자인 곽선의 첩 어리라는 여인이 미색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를 납치하여 강간하기도 하였다.


이사건은 당시에도 큰 물의를 불러일으켰던 사건이었다. 이에 크게 노한 태종이 꾸짖자 "전하는 후궁을 궁중에 받아들이면서 왜 신의 첩은 내보내 그 哭聲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가득차게 합니까?" 라고 항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양녕의 기행을 본 태종은 중대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왕조의 창업보다 어려운게 수성이라 하였는데 조선왕조가 개창한지 겨우 20년도 안된 마당에서 양녕이 훗날 군주가 되어 과연 수많은 피로 얼룩지며 세운 조선이란 나라를 지켜낼 수 있을까하는 강한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다.


일종의 정신 착란 현상을 보이는 양녕에게 지존의 자리를 준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선택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리하여 중대 결심을 하고 폐세자를 하고 충녕에게 왕위를 넘겨 주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양녕이 왕위를 충녕에게 물려주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양녕이 일부러 미친척해서 왕위를 물려준다는 목적을 달성했으면 이후의 행위는 일상으로 돌아와 보통 사람이 사는 삶을 살아야 하는게 논리적이다.


권력에 환멸을 느껴 왕위를 물려주고 나면 이제 그가 꿈꾸었던 삶을 살아가는 길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위를 살펴보면 과연 그가 세자 시절 깊은 뜻을 품고 일부러 미친척해가면서 왕위를 물려주려했는가에는 상당한 의문이 생긴다.


세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기의 기행은 계속 이어진다.


그가 사저로 물러나있으면서도 기행을 버리지 못해 담을 넘어 도망쳐서 세종과 태종이 그를 찾느라 전국에 방을 붙이기도 했으며, 남의 집 여인을 강간하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좋은 개가 있다는 소리에 강제로 개를 가져오기도하며 현재의 권력형 파렴치 행위가 줄줄이 이어졌다.


손자 단종. 죽던지 말던지

그러나 세종은 그럴 때마다 그를 용서해서 양녕이 천수를 누리게하는 것이다. 당시 왕조 사회에서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생존한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그후 단종이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과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 또한 모두 죽임을 당하는 등 왕위에 조금이라도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 모두가 인자한 세종에 의해 묻혀 그는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살펴보건데 양녕대군이 고도로 깊은 생각을 해서 의도적으로 미친척해서 왕위를 물려 주었다는 내용의 이야기는 그다지 설명력이 높아보이지는 않는다. 현대 정신심리학적으로 그를 분석하면 정확한 결과가 나오겠지만 아마 정신착란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보인다.

또한 그와 관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도 매우 많이 존재한다. 그가 가까이 했던 기생이나 잡인들은 대부분 비참한 삶을 마쳤으며, 외삼촌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회. 민무휴 등의 죽음도 그와 관련이 있었으며 그후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안평대군을 죽이는데 앞장섰으며 그후 단종을 죽이는데도 앞장을 서 이 두사람을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측면을 보건데 양녕대군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재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과연 그는 고뇌에 가득찬 왕세자인지? 아니면 단순히 양아치일 뿐인지?

의문의 여지가 많이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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