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서태후에게 숨겨진 서양 애인이 있었다?!

zzixxa 2008. 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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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의 인터넷 상에는 서태후가 만년에 29살에 불과한 영국인 군관 에드문드 백하우스(Edmund Backhouse)를 사랑했다는 비사가 심심치 않게 돌아다닌다. 이들의 연애는 6년이나 지속되었고 서태후는 백하우스에게 황궁의 보물까지 하사하였다는데……

만청사에 정통하며 이 비사를 세상에 처음 알린 북경 고궁박물관의 샹쓰 부관장은 에드문드 백하우스가 실존인물임은 사실이나 서태후 황혼연애의 진실성 여부는 아직 검토중이라고 밝혔다.

서태후의 숨겨진 연인은 젊은 영국인?

<중국시보> 기사와 인터넷상의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에드문드 백하우스에게 서태후는 권력을 휘두르는 통치자가 아닌 그저 아름다운 중국 여인이었다고 한다.

서태후와 그가 연인이 되었을 때 서태후는 68세, 백하우스는 겨우 29세였다. 서태후의 연인이라는 사실때문에 조정 중신들이 앞다투어 백하우스에게 진귀한 보물들을 바쳤다고 한다.

샹쓰 부관장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 도서관에서 서태후와 그의 서양 애인에 대한 기록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이 원고는 백하우스가 자신과 서태후의 성관계에 대해서까지 기록하고 있는데, 너무나 상세해서 낯이 뜨거울 정도였다고 한다.

에드문드 백하우스는 만청 연구에 있어서 권위 있는 저서인 <만주의 쇠락>의 저자로, 유명 역사학자의 반열에 드는 인물로 전해진다. 1902년 서태후는 서안에서 자금성으로 환궁한 후 서양인에게 우호적으로 변해 서양인을 궁으로 초대하기 시작한다. 당시 백하우스는 영국 귀족 가문 출신의 26세 청년으로, 12개 국어를 구사하며, 영국에서는 알아주는 중국통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다른 영국인들과 함께 자주 자금성에 입궁하게 된다.

그러나 백하우스에 대한 세인들의 평가는 크게 엇갈리는데, 당시 영국의 권위적인 역사가였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 그의 연구는 대다수가 조작이며 양성애자였다는 설도 있다.

한편 백하우스가 서태후로부터 받았다는 황궁의 보물은 샹쓰 부관장이 눈으로 직접 확인했으며, 건륭황제 때의 대학사 유인용이 쓴 <어초십이영>으로 진품이 확실하다고 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백하우스가 기록한 서태후와의 사랑은 진실일 확률이 크게 높아진다.

68세 서태후와 29세 청년의 사랑이 가능할까?

68세나 된 서태후가 29세의 젊은 영국 군관을 매혹시켜 사랑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서태후는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인으로서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서태후의 여시관 덕령은 서태후가 노년에 접어든 후에도 여전히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어느 정도 보존하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만청 역사전문가인 샹쓰 부관장 역시 서태후는 건강과 보신에 매우 신경을 쓴 인물이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의견을 밝혔다.

서태후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신 미모와 자색으로 입궁하게 된 경우이다. 현대적 기준에서 서태후의 외모는 단정하다 할 수 있는 수준이며, 미인의 반열에 올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서태후의 외모는 당시로서는 모든 사람들이 칭찬하는 이상적인 미인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서태후는 평소 사람의 모유를 마시고 진주가루를 복용하였으며, 연지와 달걀 흰자로‘팩’을 하는 등 보양과 미용에 항상 신경을 썼기 때문에 칠순의 나이에도 여전히 여성적 매력의 유지가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서태후의 국제연애는 진실?

그렇다면 서태후와 백하우스의 사랑은 사실일까? 왕정화 근대사연구원은 이에 대해 “백하우스 자신의 기록일 뿐이며 국제학계에서는 전부 백하우스가 지어낸 ‘소설’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고 밝혔다.

왕 연구원은 “2002년에 자신이 서태후를 연구할 당시부터 읽은 백하우스와 관련된 서태후의 혼외연애 자료는 상당히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았다”고 밝혔다. 그는 “서태후와 관련해 백하우스의 연구를 인용한 학자는 지금까지 한 명도 보지 못했으며, 그가 역사가라는 사실 자체가 의심이 간다”고 덧붙였다.

또한 당시 서태후를 직접 만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로, 서태후가 지목한 서양 화가나 일본 사진촬영사만이 입궁해 서태후를 직접 볼 수 있었다. 또한 1903년부터 서태후는 자금성에서 티 타임을 가졌는데, 여기에 초대된 이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남성은 애초에 접근이 불가능했다는 설명.

남개대학 사학과 창젠화 교수 역시 서태후에게 서양 애인이 있었다는 얘기를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전했다.


 출처 http://history.163.com/08/0110/09/41R8F22S000112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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