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가 말다가 하긴 하지만 가끔 틀어져 있으면 보는 것이 일지매라는 퓨전사극입니다.
워낙 정통사극을 좋아하는 탓도 있지만
퓨전사극은 너무 가볍고 엉뚱한 상상력을 첨부하는 게 많아서 그리 좋아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어제 보니까..
인조가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를 아예 대놓고 죽여버리네요.
독살설이 거의 정설일 정도로 나돌긴 하지만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인조의 소현세자 독살을
아주 간단명료하게 처리하는 것을 보고 이것이 퓨전사극인가? 하는 아쉬움이 떠나질 않더군요.
그래도 아주 없는 말은 아니기에 조선왕조실록 중에서 소현세자가 청에서 돌아오면서 부터 죽을 때까지 기록된 내용을 옮겨보면서 생각 좀 할까 합니다.
소현세자가 돌아온 것은 청나라에 볼모로 간지 20년만인 인조 23년입니다.
인조 23년 을유(1645, 순치 2) 2월 18일(신미)
세자가 돌아오고, 청나라 사신도 함께 칙서를 가지고 서울에 돌아오다
세자가 돌아왔고 청나라 사신도 함께 서울에 들어왔다.
이에 앞서 청나라 사신은 상이 교외에 나와서 맞이하기를 굳이 청하였는데, 상이 이때 건강이 좋지 않아서 원접사를 시켜 ‘병 때문에 교외에 나가지 못한다.’는 뜻으로 타일렀으나 사신이 허락하지 않았고 또 중신을 보내어 타일렀지만 역시 허락하지 않았다.
청나라 사신이 벽제(碧蹄)에 도착하자, 곧 낙흥 부원군(洛興府院君) 김자점(金自點)을 보내어 타이르니, 청나라 사신이 세자에게 말을 전하기를,
“황제께서 막 천하를 얻어 북경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막대한 경사이다. 그렇다면 국왕의 예로서는 의당 교외에 나와서 맞이해야 할 터인데, 병 때문에 행하지 않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다. 다만 중신과 대신이 서로 이어 와서 말하므로 마지 못하여 따른다.”
하였다. 이에 상을 부축하고 나가 대궐 뜰에서 맞이하였다. 도승지 윤순지(尹順之)와 좌부승지 이행우(李行遇)가 상의 앞에서 칙서를 받들고 봉한 것을 뜯었다. 그 칙서에 이르기를,
“지금 짐(朕)이 중원을 평정하고 천자의 자리에 오르니, 은혜가 구주(九州)에 미쳐서 온 천하가 기꺼이 추대하므로 특별히 조지(詔旨)를 반포하여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노라. 너의 조선은 천자의 교화를 입은 지 오래되어 이미 제후국의 반열에 들었으니, 의당 다른 제후국과 똑같이 크게 물품을 내리고, 특별히 너그러운 은혜를 펴서 세자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며, 종전의 범죄자들을 모두 사유한다. (후략) |
인조는 청나라를 극도로 싫어했습니다.
당연한 일이죠. 조선의 국토를 풍지박산을 냈는데 좋아하면 그게 이상한 거죠.
그런데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있다 오랬더니 어째... 청나라의 앞잡이처럼 느껴지는 건 어려운 일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당연히 갖는 생각이라고 생각됩니다.
일지매에서는 청나라와의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왕의 자리에 욕심을 내서 아들을 죽이는 비정한 아버지로 확정지어서 나옵니다만...
아주 나무랄 것은 아니고요. 왕위 때문에 자식을 죽인 왕이 어디 한둘입니까. ^ ^;
그건 그렇고 귀국한지 얼마되지 않아 소현세자가 슬슬 아프기 시작합니다.
인조 23년 을유(1645, 순치 2) 4월 23일(을해)
어의 박군이 세자를 학질이라고 진찰하다
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御醫) 박군(朴頵)이 들어가 진맥(診脈)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藥房)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李馨益)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熱)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인조 23년 을유(1645, 순치 2) 4월 24일(병자)
세자가 침을 맞다
인조 23년 을유(1645, 순치 2) 4월 25일(정축)
세자가 또 침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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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자가 아픈데도 이렇듯 간단하게 한줄 씩 적어놓은 걸 보면 그다지 심하게 아프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그쵸?
그 . 런 . 데 .....
인조 23년 을유(1645, 순치 2) 4월 26일(무인)
왕세자의 졸기
왕세자가 창경궁(昌慶宮) 환경당(歡慶堂)에서 죽었다. 세자는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 일찍이 정묘 호란 때 호남에서 군사를 무군(撫軍)할 적에 대궐에 진상하는 물품을 절감하여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하려고 힘썼다. 또 병자 호란 때에는 부왕을 모시고 남한 산성에 들어갔는데, 도적 청인(淸人)들이 우리에게 세자를 인질로 삼겠다고 협박하자, 삼사가 극력 반대하였고 상도 차마 허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세자가 즉시 자청하기를,
“진실로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군부(君父)를 보호할 수만 있다면 신이 어찌 그곳에 가기를 꺼리겠습니까.”
하였다. 그들에게 체포되어 서쪽으로 갈 적에는 몹시 황급한 때였지만 말과 얼굴빛이 조금도 변함 없었고, 모시고 따르던 신하들을 대우하는 데 있어서도 은혜와 예의가 모두 지극하였으며, 무릇 질병이 있거나 곤액을 당한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힘을 다하여 구제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심양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어서는 모든 행동을 일체 청나라 사람이 하는 대로만 따라서 하고 전렵(田獵)하는 군마(軍馬) 사이에 출입하다 보니, 가깝게 지내는 자는 모두가 무부(武夫)와 노비들이었다. 학문을 강론하는 일은 전혀 폐지하고 오직 화리(貨利)만을 일삼았으며, 또 토목 공사와 구마(狗馬)나 애완(愛玩)하는 것을 일삼았기 때문에 적국(敵國)으로부터 비난을 받고 크게 인망을 잃었다. 이는 대체로 그때의 궁관(宮官) 무리 중에 혹 궁관답지 못한 자가 있어 보도하는 도리를 잃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세자가 10년 동안 타국에 있으면서 온갖 고생을 두루 맛보고 본국에 돌아온 지 겨우 수개월 만에 병이 들었는데, 의관(醫官)들 또한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끝내 죽기에 이르렀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프게 여겼다. 세자의 향년은 34세인데, 3남 3녀를 두었다. |
너무 어이가 없지 않나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들 합니다.
저도 자식을 키우는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상을 처리하는 게 어째 데리고 있던 부하 죽은 것만도 못하게 처리를 하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소현세자의 죽음....
지금 시대는 의문사징상규명위원회니 뭐니 하는 것도 있고 미.쿡 에 그 유명한 CSI인지 뭔지도 있으니까 사인을 밝히는 것이야 별 일 아니겠지만 그때는 그리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의문까지 없었던 것은 아니었죠.
소현세자가 죽은 다음날인 4월 27일의 일입니다.
정원·옥당·약방·종친부와 문무 백관이 문안하다 (본문 생략)
흑립과 소복으로 거애할 것을 하교하다 (본문 생략)
대신이 왕세자의 상에 대해 사관을 보내 실록을 상고해 올 것을 청하다
대신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상을 뜻밖에 당하여 딴 데는 상고할 만한 문서가 없으니, 급히 사관(史官)을 강도(江都)에 보내어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서 하교하기를,
“입관(入棺)한 후의 상례에 대해서 의당 실록에 의거해서 해야겠지만 입관 이전의 상례에 대해서는 《실록》을 상고해 오기를 기다릴 수 없으니, 3일 만에 입관하는 것이 옳다.” 하니, 대신이 그럴 수 없다고 쟁론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3일 만에 입관하는 것은 사대부와 똑같은데,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찬궁은 설치하지 말고 4일 만에 성복하고 구 자를 쓰라고 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오례의》를 가져다 상고해보니, 대행왕 및 대행 왕비의 상에는 찬궁(欑宮)을 설치하고 6일 만에 성복(成服)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자의 상에는 의당 강쇄하는 것이 있어야 할 터인데, 근거할 만한 글이 없으니 어떻게 처리해야겠습니까? 재궁(梓宮)이란 두 글자는 쓸 수 없을 듯하니, 구(柩) 자로 대신 써야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찬궁은 설치하지 말고 4일 만에 성복할 것이며 구(柩) 자를 쓰라.”
양사가 왕세자의 치료를 담당한 의원 이형익 등을 국문할 것을 청하다
양사가 아뢰기를,
“왕세자의 증후(症候)가 하루아침에 갑자기 악화되어 끝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뭇사람의 생각이 모두 의원들의 진찰이 밝지 못했고 침 놓고 약 쓴 것이 적당함을 잃은 소치라고 여깁니다. 의원 이형익(李馨益)은 사람됨이 망령되어 괴이하고 허탄한 의술(醫術)을 스스로 믿어서 일찍이 들어가 진찰하던 날에 망령되이 자기의 소견을 진술했는데, 세자께서 한전(寒戰)이 난 이후에는 증세도 판단하지 못하고 날마다 침만 놓았으니, 그 신중하지 않고 망령되게 행동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형익을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고 증후를 진찰하고 약을 의논했던 여러 의원들도 아울러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여러 의원들은 신중하지 않은 일이 별로 없으니, 굳이 잡아다 국문할 것 없다.”
하였다. 재차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
이게 말이됩니까?
설사 잘못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삭탈관직 정도는 해야 될 듯 한데 한 번도 아니고 재차 아뢰었는데도 끝내 따르지 않았다면 말이죠.
그 외에도 많은 내용이 있습니다만 굳이 그것들까지 열거하지 않겠습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명에 의한 독살이었다.
라고 과감하게 말하는 드라마 일지매의 내용이 아주 싫지많은 않아서 조선왕조실록을 뒤져봤습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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