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인간 정후겸 제대로 파헤쳐 보자 1

zzixxa 2009.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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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이산이 인기를 얻으면서 덩달아 정후겸에 대한 관심이 엄청나게 많아진 모양이다. 이곳에 들어온 분들의 키워드 1위가 정후겸이고 그 횟수가 무려 500회에 가까운 걸 보면......

 

좀 얍쌉하더라도 시대의 요구에 편승하는 것이 기회를 포착하는 자의 능력이라면 능력.
이번 참에 정후겸에 대해서 제대로 한 번 파본다.

 

그렇다고 소설책을 보면서 파볼 수도 없고 그저 참고할 수 있는 건 조선왕조실록과 일성록 등 조선시대에 저술된 책들 뿐이다.

 

일단 정후겸에 대한 국조보감의 내용을 잠깐 보자. 국조보감 68권에 영조가 정조에게 선위하는 과정이 나오는데 홍인한을 이야기 하면서 정후겸의 인물됨됨이를 말하고 있다.

 

 (전략)...처음에 홍인한이 세손의 외당(外黨)으로서 뜻을 두어 바라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세손이 항상 그 위인이 탐욕스럽고 포악하며 지식이 없는 것을 비루하게 여겨 일찍이 얼굴빛을 좋게 하여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홍인한이 이로 말미암아 불만스레 원망하였다. 그런데 화완옹주(和緩翁主)의 후사(後嗣)로 들어간 정후겸(鄭厚謙)이 요사스럽고 위험한 인물로 그 어미와 더불어 상의 어묵(語黙)을 엿보아 이를 가탁하여 위복(威福)을 부렸다. 홍인한이 마침내 정후겸 모자에게 붙어 안팎으로 얽어 맺어 서로 의지함으로써 성세(聲勢)를 삼았다. 그리고는 세손의 영명함으로 훗날 죄가 불측한 지경에 이르게 될까 두려워 홍지해(洪趾海)ㆍ윤양후(尹養厚) 등과 더불어 사당(死黨)을 맺고 밤낮으로 유언비어를 만들어 내어 저위(儲位)를 위태롭게 하려 하였다. 대리 청정에 관한 하교를 듣고 나서는 놀랍고 두려워 이렇게 온갖 방책으로 막으려 하였던 것이다....(후략)

 

국조보감은 조선 역대 국왕의 치적 중에서 모범이 될 만한 사실을 수록한 편년체의 역사책이니 국왕과 반대한 세력에 대해서 좋게 나올리는 없지만 실록과는 다른 방법의 기록이니 참고해서 해로울 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국조보감의 정조대왕 어제서문에 다음과 같이 보감에 대해서 설명해놓고 있다.

 

실록(實錄)과 보감(寶鑑)은 모두 사서(史書)이다. 그러나 그 체재는 다르다. 크고 작은 사건과 득실 관계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명산(名山)에다 보관해 둠으로써 이 세상이 다할 때까지 전하려는 것은 실록이며, 훈모(訓謨)와 공렬(功烈) 중에서 큰 것을 취하여 특별히 게재해서 후세 사왕(嗣王)의 법으로 삼게 하려는 것은 보감이다. 실록은 비장성(祕藏性)이 있는데 반해 보감은 저명성(著明性)이 있으며. 실록은 먼 훗날을 기약하는 데 반해 보감은 현재에 절실한 것이다.

 

머리아프니까 쓸데 없는 말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정후겸이 실록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영조 40년 4월이다.

 

 ● 실록 영조 40년 4월 14일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이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의 아들 정후겸(鄭厚謙)에게 《대전(大典)》에 의하여 품계에 따라 부직(付職)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정후겸의 아비 정석달(鄭錫達)은 인천(仁川)에 살면서 생선 장수로 업을 삼고 있어 집안이 몹시 한미하였는데, 그 아들 정후겸으로 정치달의 뒤를 잇게 하였으니, 그때 나이 겨우 16세였다. 전조(銓曹)에서는 그 말에 따라 정후겸에게 장원서봉사(掌苑署奉事)를 제수하였다.

 

정후겸의 시작은 이렇듯 홍봉한이 열어준다. 그래서 마지막도 같이 하지만 말이다. 정치달의 아내가 바로 화완옹주이니 정후겸으로서는 걷기도 전에 나는 기회를 얻은 것이기도 하다. 아무튼 정후겸은 영조 41년 양장에 합격하게 된다. 이로봐서 그 재능이 뛰어난 것은 확실하다.

양장... 과거 시험에는 초장(初場)·중장(中場)·종장(終場)의 3장이 있는데, 이 3장 중의 2장을 말하는 것이다. 말솜씨가 없으니 다시 실록을 인용한다.

 

 ● 실록 영조 41년 윤2월 2일
임금이 생원·진사의 입격인(入格人)을 소견하였다. 당시 정후겸(鄭厚謙)은 1소(一所)에 응시하여 양장(兩場)을 모두 합격하였는데, 정후겸은 곧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양자(養子)이었다.

 

영조 42년 5월 즉 정후겸이 18세이던 해 영조는 정후겸을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한다. 장원서 봉사가 종8품이고 홍문과 부교리가 종5품이니 급속승진이라고 말해야 되나? 하지만 12일 뒤 정후겸은 사헌부의 지평으로 임명된다. 사헌부 지평은 정5품. 하지만 정후겸이 아스팔트길 같은 탄탄대로만 걷고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영조 43년 1월의 실록을 살펴보자.

● 실록 영조 43년 1월 11일
수찬 정후겸(鄭厚謙)이 상소하여 태묘(太廟)에 술 쓰기를 청하고, 또 아직까지 죄에 얽매어 있는 산림(山林)과 말 때문에 죄를 입은 대신(臺臣)에게 모두 은유(恩宥)를 내릴 것을 청하였으며, 말미(末尾)에 형조 판서 심수(沈鏽)가 불법(不法)을 행하여 사복(私腹)을 채운 것을 논하고, 두 전관(銓官)과 탁지(度支)의 의망(擬望)을 개정하기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연소배가 숨김이 없으니 뜻은 가상하나, 이미 면칙(面飭)을 받고도 어찌 감히 이렇게 하는가? 끝의 일은 이러한 자들이 참섭(參涉)할 것이 아닌데, 이런 상소를 한 후에만 명관(名官)이라 할 수 있는가? 이 글을 돌려주고 영원히 서용하지 말라.” 하였다. (후략)

 

태묘에 술을 사용하는게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때는 금주령이 선포된 때였던지라 사안이 민감했고 어찌보면 왕의 결정에 반박하는 모양새이기도 했다. 의지가 곧은 것인지 배경을 믿고 설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갑론을박 끝에 술을 사용했으니 결국은 왕의 뜻을 꺽은 일일수도 있겠다.

● 실록 영조 43년 3월 11일
부수찬 정후겸(鄭厚謙)이 상소하기를, “신은 정이환(鄭履煥)과 더불어 사실을 말한 것은 같았는데 죄명은 달랐습니다. 신은 치우치게 큰 은혜를 입었는데, 정이환은 아직도 위리 안치(圍籬安置) 중에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상소를 읽으라 명하고, 말하기를, “연소배(年少輩)의 마음가짐이 비록 가상하나, ‘정이환과 더불어 사실을 말한 것이 같았다.’고 한 것은 너무 지나치다.”
하고는 ‘계(啓)’ 자를 찍으라 명하였다.

 

여기서 벼슬 이름을 한 번 보자. 술쓰기를 청할 때는 수찬이었으나 이번에는 부수찬이다. 출세가도에 슬~쩍 제동이 걸린 게 맞는 것 같다. 물론 화완옹주의 든든한 배경이 있으니 걸려봐야 얼마나 걸리겠느냐마는 정원 유지양이 제주를 다시 쓴 과정을 상소하면서 정후겸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한다.


● 실록 영조 43년 3월 15일
“정후겸(鄭厚謙)은 나이가 약관(弱冠)이 못되어 학문이 통방(通方)하지 못한데도 외람되이 과거에 급제하고 곧바로 강서원(講書院)에 등용되었습니다. 성왕(聖王)은 사(私)가 없어야 한다는 것은 공성(孔聖)의 교훈이요, 동자(童子)가 벼슬을 갖춘다는 것은 경강(敬姜)의 경계한 바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비답을 내리지 않고 먼저 유지양을 체직하였다.(후략)

 

물론 영조에게 먹힐리가 없으니 유지양이 체직을 당했겠지만 이것은 정후겸의 출세가도에 당파간의 싸움이라는 걸림돌이 생겼다는 뜻이다. 물론 슬~쩍 걸리는 돌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돌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자갈 수준인가?

 

정후겸은 영조 43년 12월 문학으로 임명되고 정후겸의 나이 20세인 영조 44년 6월 승지로 임명된다. 20세의 승지라.... 승지도 나름대로 여러종류의 승지가 있으니 딱히 품계를 논할 일은 아니지만 승지가 된지 10일만에 다시 호조참의로 임명된다.

 

참의가 어떤 위치인가?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는 일이었지만 발언권은 판서와 동등했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겠다. 생각해보자. 지금 대한민국의 내무부 차관이 20세라면 어떨지...능력도 능력이지만 배경이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한번으로 끝내지 못하고 연재를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사실로만 토대를 해서 적어가려니 딱딱하고 재미없고 말도 싸래기를 먹었는지 짧게 하고... 맘에 안들면 더이상 보지마세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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