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인간 정후겸 제대로 파헤쳐 보자 3

zzixxa 2009. 4. 21.
반응형


두번째에서 정후겸의 정조탄핵작전이 극에 다다르는 것 까지 찾아봤는데 이것은 곧 정후겸을 비롯한 노론의 위기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대충 1년 정도만 거슬러 올라가보자.

 

● 영조 51년 1월 19일
영의정 신회(申晦)가, 정후겸(鄭厚謙)을 비국 당상에 차출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은 전하의 외손(外孫)이지 척리(戚里)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나의 외손(外孫)인데, 척리(戚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옛날에 동자(童子)로 관원을 갖추었다는 비난이 있었는데, 이 말이 꼭 맞다.” 하였다.
좌의정 이사관(李思觀)과 우의정 홍인한(洪麟漢)도 또한 그것이 합당함을 아뢰자, 임금이 말하기를,
“내버려 두도록 하라.” 하였다. 이사관이 원의손(元義孫)을 비국 당상에 도로 차출하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영의정은 아직 내버려 두고자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영의정은 그가 생질(甥姪)이기 때문에 원의손을 다시 차출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나로 하여금 정후겸을 쓰게 하려 하는 것인가?” 하니, 신회가 대답이 없었다. 당시 정후겸(鄭厚謙)은 나이 20여 세이었는데, 신회(申晦) 등이 깊이 스스로 결탁하려고 하였으며, 또 망령된 뜻으로 영합(迎合)하여 극렬 추천하였으나, 임금의 뜻은 동자로 관원을 채우고자 하지 않았으니, 대신이 된 자로서 능히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잘나가는 정후겸이 비국당상에 차출죄지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정후겸만의 문제가 아니다. 노론 전체의 위기의식을 고조시키는 일이고 그 탓에 정후겸과 노론은 악수를 두게 된 것이다. 덕분에 영조도 슬슬 이들의 행태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영조의 심적변화는 겉으로 슬슬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영조 51년 3월15일 정후겸의 개노릇을 자처하는 이담이 국문을 당하게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담은 석방되지만 같이 국문을 당하던 남강로와 이적보는 무사하지 못한다. 잠시 실록을 보자.

 시임 대신·원임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남강로·이적보를 절도(絶島)에 천극(栫棘)시킬 것을 청하자, 임금이 성난 목소리로 문을 치면서 말하기를, “속히 본부에 국청(鞫廳)을 설치하여 남강로를 엄중히 형신(刑訊)해서 공초를 받아 아뢰도록 하라. 이적보는 물어 볼 만한 것이 없으니, 흑산도(黑山島)에 천극(((귀양살이하는 중죄인의 거처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둘러쳐서 출입을 제한하는 것)))하고, 삼족(三族)을 서민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깊이 생각할 것 없다. 한마디로 X된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노론이 그렇게 된 건 절대아니다.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사람들인가. 그저 힘없는 남강로와 이적보가 희생양이 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하지만 노론에게 시련은 계속된다. 다시 한 번 실록을 뒤져보자.

 ● 영조 51년 11월 30일
임금이 여러 대신(大臣)들을 불러 보았다. 김상복(金相福)이 나와 엎드려 아뢰기를,
“전하께서 오늘 내리신 하교는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이것이 어찌 신자가 되어 감히 들을 수 있는 일입니까? 신 등은 전하를 우러러 보기를 마치 연소(年少)하신 군상(君上)같이 여겼습니다. 놀라고 당황함을 견디지 못하여 들어 왔습니다.”
하고, 김상철(金尙喆)은 말하기를,
“신은 삼가 예사롭지 않은 하교를 삼가 듣고 놀라 당황함을 견디지 못하여 서로 이끌고 구대(求對)하고자 합니다. 용인(用人)이나 용병(用兵) 등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더욱 이 나라의 대사(大事)이므로 비록 대리(代理)할 때일지라도 이 몇 가지 일은 자연 성상께서 친히 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이미 대리 청정하는 등의 일과는 다르고 궐내(闕內)에서 수고로움을 대신한 것은 전례(前例)가 이미 많았는데, 경 등은 어찌 이와 같이 너무도 지나치게 생각하는가? 이는 바로 3백 년 내려온 고례(古例)이고 나도 또한 일찍이 하였던 일이다.”
하였다.

(중략) 이 부분에서 노론은 난리법석을 피우며 반대를 한다.

임금이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순감군(巡監軍)을 동궁이 점하(點下)하는 것은 곧 3백 년 된 고사(故事)이다. 옛날 내가 눈병이 났을 때 숭릉(崇陵)의 고사를 따라 중관(中官)이 부표(付標)를 하였는데, 지금 이 전례를 사용하는 것은 대리 청정과 아주 가깝지 않다. 아무리 임석(臨席)한 앞에서 부표하더라도 하교를 잘못 들으면, 수망(首望)이라고 한 것을 부망(副望)에 잘못 부표하게 된다.

이것은 오히려 이와 같더라도, 중관(中官)이 혹시라도 자기 마음대로 용사(用事)한다면 나라의 흥망에 관계되는 것이므로, 조용히 생각하여 보고 옛날의 규례로 돌아가 이와 같이 하교한 것이다.

옛날 황형(皇兄)[각주:1]께서 하교하신 그 당시에 이르기를, ‘세제(世弟)가 좋겠는가? 측근의 신하가 좋겠는가?’ 하였는데,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까지도 목이 메인다. 고례(故例)가 분명하여 조금 전에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를 〈세손으로 하여금〉 달하(達下)하게 한 것이다.

만일 이것이 청정(聽政)이라면 다투는 것도 가하다. 그런 까닭으로 내가 하교하려고 함에 이것은 이것과는 아주 다른 것인데, 그것을 어찌 크게 떠벌리고 있는가? 나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동요되어 기운이 10층(層)은 떨어졌다. 부자(附子)를 더 들이라는 명도 이 때문이다.

긴요하지 않은 공사를 달하하라는 하교를 특별히 정지하고 이 하교를 전례(前例)대로 거행하도록 하라. 할아비와 손자가 손수 점하(點下)하는 것이 옳겠는가? 엄수(嚴竪)의 손으로 부표하는 것이 옳겠는가? 이는 하늘과 땅, 흑(黑)과 백(白)의 차이이다. 이 어찌 그다지도 급히 서두르는가?

영상(領相)이 명을 들었으면 승선(承宣)이 입시할 때에 따라 들어오는 것이 마땅한데, 그를 불렀으나 간 곳을 알 수 없었으니 이것이 과연 보상(輔相)의 도리인가? 이는 아주 뜻밖의 일이다. 영의정 한익모(韓翼謨)를 서용(敍用)하지 않는 벌을 빨리 시행하도록 하라.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만일 깨닫지 못한다면 내가 마땅히 구저(舊邸)에 나가서 심신(心神)을 조금 쉬어야 하겠다.

전후(前後) 상협련군(廂挾輦軍)[각주:2]은 이전 하교에 의하여 거행(擧行)하되, 하교를 기다려 대령하였다가 다만 정시(正時)가 되거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중략)

임금이 전교를 쓰라고 명하기를,
“조금전에 서둘던 일을 지금 시임 대신·원임 대신들이 타협하였으니, 거둥을 그만두게 한다.”
하였다. 홍인한이 말하기를,
“거둥을 그만두게 한다는 허락을 받고 신 등은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어서 천세를 부르고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물러나왔다. 당시에 청대(請對)하고 입시한 여러 대신(大臣)들이 상세하게 정지하기를 힘껏 청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다만 순감군을 낙점하는 것뿐만 아니라 무릇 모든 공사의 수응과 정망(政望)의 낙점도 마땅히 수고를 대신하게 하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은 다만 순감군만 궐내에서 점하(點下)하는 줄로 알고 있었는데, 홍인한은 언찰(諺札)로 인하여 임금의 뜻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왕세손이 홍인한에게 이르기를,
“대리 청정은 오히려 전례가 있었지만 궐내에서 수고를 대신하는데 있어서는 상소에 대한 비답을 얻는 것이 문서의 판하(判下)를 받는 것까지도 모두 세손에게 대신 행하도록 하셨고, 또 대보(大寶)와 계자(啓字)도 다 동궁에 보관하여 두라는 명으로 하교하셨습니다. 윤자(允字)를 써서 내리는 것과 계자(啓字)를 찍어 내려 주는 것은 곧 대섭(代攝)하는 것이므로 명을 받들기가 어렵습니다. 모름지기 좋은 말로써 앙주(仰奏)하여 주시오.”
하였으나, 모르는 체하면서 이에 말하기를,
“궐내에서 한 일을 신 등이 어찌 알겠습니까?”
하고 대답하며, 서로 이끌고 물러갔다.

(후략)

 영조의 강력한 왕권으로도 중신들의 반대를 쉽게 저버릴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정조입장에서는 참으로 힘든 싸움이 계속된다.


  1. 경종 [본문으로]
  2. 상군(廂軍)과 협련(挾輦)의 준말. 상군은 임금의 거둥때 호위하는 군사이며, 협련은 훈련 도감에 딸린 군대로 임금의 연(輦)을 호위하는 군사임. [본문으로]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