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인간 정후겸 제대로 파헤쳐 보자 2

zzixxa 2009. 4.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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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부터 슬슬 뒤져봅니다.

 ● 실록 영조 45년 2월 13일
임금이 융무당(隆武堂)에 나아가 시사(試射)하니, 국구(國舅)·부마(駙馬)·종신(宗臣)·문신(文臣)이 모두 참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국구와 나란히 함께 쏘겠다.” 하고, 임금이 궁시(弓矢)를 가지고 쏘려 하다가 김한구(金漢耉)에게 명하여 나란히 쏘게 하였다. 김한구가 먼저 1시(矢)를 명중시키고 임금이 쏘아서 1시를 명중시켰는데, 북을 울리며 풍악을 연주하자 시위(侍衛) 이하가 모두 기뻐하였다. 쏘기를 마치고 김한구에게 구마(廐馬) 1필을 면급(面給)하라 명하고 부마 이하가 각각 차례로 쏘자 차등 있게 상을 나누어 주었는데, 혹 말을 내려 주거나 혹은 가자(加資)하게 하였으며, 특별히 정후겸(鄭厚謙)을 승자(陞資)시키도록 명하였다.

 도대체 영조가 활을 쏠 때 정후겸은 뭘 했길래 승자시키도록 명했을까? 암튼 복은 타고난 사람인 모양이다. 

 ● 실록 영조 46년 10월 20일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영의정 김치인(金致仁)이 말하기를, “병조 참판 정후겸(鄭厚謙)은 이력이 이미 만족하고 재주 역시 갖추어졌으므로, 비국 당상으로 차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차정한들 무엇하겠는가? 이미 그에게 글을 써 준 것이 있으므로 승전(承傳)을 받들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였다.

뭐 이런 식이다. 그렇다면 비국당상(備局堂上)이 뭘까.

비국당상은 조선 시대에, 비변사의 당상관을 이르던 말로 통정대부 이상의 벼슬아치를 이른다. 그렇다면 정후겸은 정3품으로 올라선 것이다. 뭐 어찌됐던 정후겸은 영조 46년 12월 공조참판, 영조 47년 9월 경기관찰사[각주:1] 등 벼슬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고싶으면 할 수 있을만큼 영조의 신임은 두터웠다. 물론 이것은 모두 화완옹주의 아들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정후겸의 능력은 의심하지 않는다. 영조 49년에 치뤄진 응제[각주:2]에서 수석을 함으로써 자신의 능력 또한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정조에게 향했더라면 좀 더 평안한 삶을 살 수도 있을터인데...

이렇듯 막힘없는 정후겸인지라 그에게 달라붙는 사람도 상당히 많았고 개중에는 대놓고 정후겸의 개 노릇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예가 이담이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 담은 사람 됨됨이가 겉으로 풍기는 기색과 마음은 거칠고 조잡하지만 오직 진출하는 데에 힘써 정후겸(鄭厚謙)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항상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특별히 좋아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없으나 백익(伯益)이 좋아하는 바를 좋아하며 백익이 미워하는 바를 미워할 뿐이다.’라고 하였는데, 백익은 바로 정후겸의 자(字)였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비웃었지만 이담은 조금도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대충 인간됨됨이를 알 수 있는 대목이지만 이것은 정후겸의 위세가 그만큼 대단한 탓도 없지는 않다.
다시 실록을 보자
 

 ● 영조 49년 7월 27일
왕세손이 작(爵)을 올리고 여러 신하가 숭호(嵩呼)함을 사옹원의 예(例)와 같이 하였다. 두 제조(提調)에게 말을 내려 주기를 명하였다. 임금이 정후겸(鄭厚謙)과 도승지 심이지(沈頤之)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경 등은 오늘 술잔으로 감정을 푸는 것이 옳다.” 하고, 세손(世孫)에게 말하기를, “두 경(卿)에게 이미 감정을 풀게 하였는데, 만약 풀지 못하면 네가 반드시 억제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만약 풀지 못하면 네가 반드시 억제해야 할 것이다.... 이거 참.

이렇듯 영조는 세손에게 참을 것을 명할 정도로 노론과 정후겸의 위세는 대단했고 정후겸의 정조 탄핵작전은 점점 극을 치닫게 된다.

실록을 옮겨적으면서 두 번째 글을 마친다.

 ● 영조 51년 12월 3일
(전략)
신(臣)이 삼가 상고하건대,
정후겸(鄭厚謙) 모자(母子)가 홍인한의 여러 적들을 끼고서 내외에서 요사한 일을 선동하여 사변(事變)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10월 7일 안으로부터 하교가 있으면서부터 외척 관계의 여러 역적들이 본디 먼저 외정(外廷)에서 들어 알고는 지휘(指揮)·배포(排布)함이 열에 여덟, 아홉이었다.

그후 11월 20일의 연교(筵敎)와 긴요하지 않은 공사(公事)를 동궁으로 들이고 대점(代點)하라는 명이 계속 내렸는데,
임금이 매양 한번 하교하면 여러 역적들이 문득 한번의 흉계를 더하였다. 이때를 당해서 대리 청정(代理聽政)의 대책(大策)이 이미 결정되었으나, 대리 청정의 성명(成命)이 내리지는 않았었다.

여러 역적들이
백가지 계책으로 저지한 것이 그 형세가 이에 더욱 급하게 되었고, 그들의 계책이 또 대리 청정을 저지하는 데서 그치지 않을 뿐 아니라, 위급한 기미가 호흡하는 사이에 있을 만큼 박두하였다.

궁료(宮僚)들이 사생(死生)을 걸고 흉역(凶逆)의 정상을 한번 밝히고자 하여 그 계책을 결행했으나, 처지가 혐의쩍어 단지 화(禍)만 불렀을 뿐이었다.

서명선(徐命善)이 이에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의 위급에 죽을 결심으로 마침내 한마디 말을 아뢴 지 며칠이 되지 않아서 대책(大策)이 빨리 정해졌으므로 우리 나라 4백 년 큰 기업(基業)이 길이 공고하게 되었다.

서명선 같은 이야말로 참으로 옛날의 이른바 위충(危忠)이라고 할 수 있으니, 그 공로는 또 어떠한가?

송형중이 억지로 부당한 말을 끌어대어서 홍인한을 위해 변명하여, ‘심각한 글이다.’라고까지 하면서 서명선을 배척한 것을 살펴보면, 적의 세력이 크게 날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번 성상의 해와 달 같은 밝으심이 아니었더라면, 서명선은 흉도들에게 어육(魚肉)이 된 지 오래였을 것이니, 아! 오늘날까지 나라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생각해도 오래오래 더욱 잊지 못할 것이다.

드라마 이산에서 슬슬 서명선의 활약도 기대해보자.


  1. 이건 정후겸이 극구 사양해서 취소됐지만 어찌됐던 맘만 먹으면 가질 자리였다. [본문으로]
  2. 임금의 명에 의하여 글을 짓는 것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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