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2화. 숨이 돌아왔을 때
숨이 먼저 들어왔다.
깊지도, 시원하지도 않은 숨이었다.
공기가 폐 끝까지 닿지 못하고 중간에서 걸리는 느낌이었다.
강진혁은 본능적으로 호흡을 조절하려 했다.
들이마시고, 멈추고, 내쉰다.
횡격막이 제대로 내려가지 않았다.
폐가 반쯤만 움직였다.
다시.
들이마시고, 멈추고, 내쉰다.
조금 더 깊게.
가슴이 절반쯤 부풀었다가 다시 꺼졌다.
완전하지 않았다.
폐활량이 떨어져 있었다.
'살아 있다.'
판단이 먼저였다.
의식은 돌아왔고, 심장은 뛰고 있었다.
리듬은 느렸지만 규칙적이었다.
쿵… 쿵…
맥박이 손끝보다 먼저 머릿속에서 느껴졌다.
목이 아니라, 귓속에서.
익숙한 감각이었다.
분당 오십에서 육십 사이.
서맥이었다.
하지만 안정적이었다.
다시 호흡.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쉰다.
산소가 부족한 느낌은 없었다.
폐포 교환은 정상.
단지 근력이 약할 뿐.
'횡격막 약화.'
호흡근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장기간 와상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증상.
눈을 뜨려 했지만 바로 뜨지 않았다.
눈꺼풀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힘을 주자 속눈썹이 서로 붙어 있는 게 느껴졌다.
말라붙은 눈곱이었다.
깜빡이자 시야가 흔들렸다.
초점이 맞지 않았다.
눈을 몇 번 더 깜빡였다.
천천히 선명해졌다.
밝지 않았다.
어둡지도 않았다.
누렇게 흔들리는 빛이 천장에 번져 있었다.
'형광등이 아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는 데 시간이 걸렸다.
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고정된 광원이 아니라, 움직이는 불빛.
천장을 봤다.
나무 서까래가 보였다.
검게 그을린 목재.
기와지붕 아래의 구조.
등잔불이었다.
그림자가 천장 위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냄새가 들어왔다.
소독약도, 알코올도 아니었다.
쓴 풀 냄새.
말린 약재.
습기 섞인 나무 냄새.
그을린 기름 냄새.
'병원은 아니다.'
확신이 들었다.
그제야 주변을 느끼기 시작했다.
등에 닿은 바닥은 차갑지 않았다.
매끈하지도 않았다.
거칠고, 울퉁불퉁한 나무의 감촉.
몸 아래에서 미세한 삐걱임이 전해졌다.
체중을 실을 때마다 나무가 신음했다.
귀에서 다른 소리들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
어딘가에서 개 짖는 소리.
멀리서 들리는 사람들의 목소리.
낮고 느린 말소리.
손가락을 움직여 보려 했다.
엄지.
미세하게 움직였다.
검지.
역시 움직였다.
감각은 있었다.
하지만 힘이 없었다.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손목을 들어 올리려 하자 몇 센티미터쯤 떠오르다 다시 떨어졌다.
팔꿈치를 굽히려 했지만 중간에서 멈췄다.
어깨는 아예 반응하지 않았다.
'마비는 아니다.'
판단이 나왔다.
좌우 감각은 정상.
통증도 느껴진다.
발가락 끝을 움직이자 반응이 왔다.
신경 전달은 살아 있다.
'근력 저하.'
심각했다.
장기 와상 환자 수준에 가까웠다.
근육이 거의 소실된 상태.
얼마나 오래 누워 있었을까.
일주일?
한 달?
아니, 그 이상일 수도.
숨을 들이마시자 갈비뼈 안쪽이 조였다.
가슴이 크게 오르지 않았다.
체중이 많이 빠진 느낌이었다.
등뼈가 바닥에 직접 닿는 감각이 선명했다.
견갑골의 모서리가 나무판에 눌렸다.
'탈수. 영양 결핍.'
입안이 말라 있었다.
혀가 입천장에 달라붙었다.
침을 삼키려 했지만 침샘이 거의 비어 있었다.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갈증.
심했다.
그제야 고개를 조금 돌렸다.
목이 뻣뻣했다.
근육이 굳어 있었다.
관절이 삐걱거렸다.
시야 한쪽에 낡은 장이 보였다.
서랍이 여러 개 달린 약장.
손잡이마다 종이가 붙어 있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붓글씨.
당귀.
글자를 읽는 순간, 의미가 따라왔다.
생각하지 않았는데, 알았다.
'…왜 알지.'
배운 기억은 없었다.
떠올리려 해도, 그런 장면은 없었다.
한의학 수업을 들은 적도 없었다.
하지만 알았다.
당귀는 혈을 보한다.
보혈약이다.
여성의 월경 관련 질환에 쓴다.
혈허로 인한 창백, 어지러움.
지식이 머릿속에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다음 서랍.
천궁.
역시 읽혔다.
의미도 동시에 떠올랐다.
천궁은 기를 순환시킨다.
활혈행기.
두통과 어지러움에 쓴다.
당귀와 함께 쓰면 보혈활혈.
그 다음.
백작약.
진통과 진경.
근육 경련을 풀고 통증을 완화한다.
복통, 사지 경련.
감초.
조화제.
약성을 조화롭게 한다.
거의 모든 처방에 들어간다.
황기.
보기약.
기를 보충한다.
기력 저하, 자한.
지식이 흘러나왔다.
막을 수 없었다.
읽으면 알았다.
'이건…'
내 지식이 아니었다.
배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
그때였다.
머릿속 어딘가가 찌릿했다.
통증이 아니라, 파열에 가까운 감각.
장면이 튀어나왔다.
좁은 골목.
낡은 간판.
한약방.
장면이 선명했다.
기억처럼.
사람들의 수군거림.
'돌팔이.'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몰랐다.
하지만 익숙했다.
'약 먹고 더 아파졌다.'
또 다른 목소리.
'돈만 받아 챙긴다.'
비웃음.
가슴이 이유 없이 내려앉았다.
숨이 막혔다.
자괴감.
분노.
체념.
'내 감정이 아니다.'
그렇게 판단했지만,
감정은 분명 가슴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억지로 누르려 해도, 밀려왔다.
또 다른 장면.
빈 약장.
서랍을 열었다.
텅 비어 있었다.
약재가 없었다.
다른 서랍을 열었다.
역시 비어 있었다.
마지막 서랍.
동전 몇 닢.
그게 전부였다.
배고픔.
어지러움.
계단을 올라가는 장면.
발이 헛디뎠다.
몸이 기울었다.
쓰러졌다.
'이건…'
기억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처럼 선명했다.
강진혁의 기억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기억이었다.
하지만 가슴속에서 느껴졌다.
실제처럼.
강진혁은 눈을 감았다.
호흡을 다시 세었다.
들이마시고, 내쉰다.
맥박.
규칙적.
의식.
명료.
정리가 조금씩 돌아왔다.
'혼란은 없다.'
의식은 분명했다.
강진혁이었다.
서울대 의대를 나왔고, 응급의학과 전문의였고, 새벽 네 시에 탈의실에서 쓰러졌다.
그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여기 있었다.
어디인지는 몰랐다.
왜 여기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몸은 움직일 수 없었고,
머릿속엔 모르는 지식이 있었고,
가슴속엔 모르는 감정이 있었다.
'상황 파악부터.'
늘 하던 대로.
천장을 다시 봤다.
나무 서까래가 드러나 있었다.
기와지붕 아래의 구조.
한옥이었다.
벽은 흙벽.
회반죽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갔다.
곰팡이 얼룩이 있었다.
창문은 한지 창호문.
틈새로 바람이 들어왔다.
찬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온도는 낮았다.
겨울이었다.
입김이 희게 나왔다.
방 안을 둘러봤다.
약장 외에는 별로 없었다.
낡은 상.
찻잔 하나.
물이 식어 있었다.
벽에 걸린 액자.
붓글씨.
懸壺濟世.
현호제세.
읽혔다.
의미도 떠올랐다.
약병을 걸고 세상을 구제한다.
의원의 덕목.
'의원.'
이 방의 주인은 의원이었다.
그리고 지금,
강진혁이 이 방에 누워 있었다.
'이 몸의 주인은…'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정적이 깨졌다.
문밖에서 소리가 났다.
급한 발소리.
나무 바닥을 울리는 소리.
쿵, 쿵.
빠른 걸음.
뛰어오는 소리.
"의원 나으리!"
목소리가 떨려 있었다.
숨이 가빴다.
말끝이 흔들렸다.
문이 흔들렸다.
주먹으로 두드리는 소리.
쿵쿵쿵.
"사람 좀 살려주십시오!"
목소리가 절박했다.
문 너머에서 거친 기침 소리가 들렸다.
깊은 기침.
폐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소리.
콜록, 콜록.
피 섞인 가래를 뱉는 소리.
퉤.
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진혁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몸은 여전히 무거웠다.
일어날 수 없다는 판단이 먼저 들었다.
'지금은 무리다.'
팔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손목까지만 겨우 움직였다.
상체를 일으키는 건 불가능했다.
복근이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머릿속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기침 소리의 깊이.
호흡 간격.
가래 소리의 점도.
판단이 튀어나왔다.
'객혈.'
기침이 다시 들렸다.
이번엔 더 격렬했다.
몸을 웅크리는 소리가 들렸다.
콜록, 콜록, 콜록.
숨을 제대로 들이마시지 못하는 소리.
쌕쌕거림.
천명음.
'기도 폐쇄 가능성.'
호흡음이 불규칙했다.
흡기 시 천명.
폐쇄성 질환 의심.
문이 열릴 기척이 없었다.
밖의 사람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의원 나으리, 계십니까!"
목소리가 다급했다.
애원에 가까웠다.
진혁은 입을 열려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너무 말라 있었다.
숨을 한 번 더 들이마시고,
힘을 주었다.
"…들어오시오."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래 쓰지 않은 목소리였다.
낮았고, 거칠었다.
강진혁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문이 열렸다.
찬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한 사내가 뛰어 들어왔다.
등에 사람을 업고 있었다.
여자였다.
젊었다.
이십 대 중반쯤.
얼굴이 창백했다.
입가에 피가 묻어 있었다.
사내가 여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의원님,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진혁은 여자를 봤다.
호흡.
빠르고 얕다.
분당 삼십 회 이상.
빈호흡.
입술.
청색증.
산소 포화도 저하.
손끝.
차갑고 창백하다.
말초 순환 장애.
'쇼크.'
판단이 나왔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다.
응급실은 여기였다.
'웹소설 > 한량으로 살고싶은 의원이 너무 유능함'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량으로 살고싶은 의원이 너무 유능함 004화. 소문은 피보다 빨리 번진다 (1) | 2026.02.09 |
|---|---|
| 한량을 살고싶은 의원이 너무 유능함 003화. 몸보다 판단이 빨랐다 (0) | 2026.02.09 |
| 한량으로 살고싶은 의원이 너무 유능함 001화. 끝났다고 생각했다 (1) | 2026.0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