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01화. 끝났다고 생각했다
서울, 대학병원 응급의료센터. 새벽 세 시를 넘긴 응급실은 늘 비슷했다. 조명은 밝고, 사람은 적고, 소리는 많았다.
모니터 경보음, 휠체어 바퀴 소리, 보호자의 낮은 울음, 간호사들의 발걸음. 소리들이 겹쳐 하나의 리듬을 만들었다. 강진혁은 그 리듬 속에서 차트를 쓰고 있었다.
펜을 쥔 손목이 묵직했다. 어제부터였나, 그제부터였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커피를 마신 게 언제였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자판기 앞에 섰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시간이 뭉개져 있었다.
"외상 환자 도착합니다. 다중 추돌, 네 명."
자동문이 열리며 찬 공기가 밀려들었다. 눈이 녹은 물이 타일 위로 번졌다. 소독약 냄새와 차가운 공기가 섞였다. 금속 냄새도 있었다. 피였다.
강진혁은 가운 소매를 걷어 올리며 들것을 훑었다. 얼굴이 아니라 가슴과 복부부터 봤다. 호흡, 피부색, 복부 팽만. 세 박자 안에 순서가 정해졌다.
"1번 흉부. 2번 복부. 나머지는 뒤로."
간호사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질문은 없었다. 이미 수없이 반복된 동선이었다.
1번 환자. 남성, 사십대 추정. 입술이 청색증을 띠었다. 경정맥이 팽창해 있었다. 오른손으로 목을 짚었다. 맥박이 빨랐다. 약하고 불규칙했다.
청진기를 대자마자 떼었다. 왼쪽 호흡음이 없었다.
"긴장성 기흉."
설명은 없었다. 메스가 먼저 나갔다. 다섯 번째 늑간, 익숙한 위치. 칼날이 피부를 가르는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저항, 관통, 해제. 피부가 갈라지고 공기가 빠져나왔다.
쉿—
압력이 해제되는 소리. 모니터 경보음이 멈췄다. 산소포화도 수치가 천천히 올라갔다. 82, 85, 88, 91.
환자의 얼굴에서 청색이 빠졌다. 호흡이 안정되었다. 가슴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다음."
장갑을 벗었다. 피가 묻어 있었다. 쓰레기통에 던지고 새 장갑을 꺼냈다. 라텍스가 손등을 조이는 감각이 선명했다.
2번 환자의 복부를 눌렀다. 반동. 둔탁한 타진음. 복부가 팽만해 있었다. 피부가 창백했다. 맥박을 짚었다. 빠르고 약했다. 혈압이 떨어지고 있었다.
"내출혈. 수술실 콜."
간호사가 전화기를 들었다. 강진혁은 이미 다음 환자로 넘어가고 있었다.
3번, 골절. 대퇴골 개방성 골절. 뼈가 피부를 뚫고 나와 있었다. 출혈은 많지 않았다. 동맥 손상은 없었다. 발등 동맥을 짚었다. 박동이 느껴졌다.
"정형외과 콜. 부목 대고 진통제."
4번, 열상. 이마에서 턱까지 깊게 찢어진 상처. 출혈은 멈춘 상태. 안면신경 손상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마를 찡그리라 했다. 양쪽이 대칭으로 움직였다. 입 꼬리를 올리라 했다. 문제없었다.
"봉합 준비."
바늘을 쥐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바늘 끝이 흔들렸다.
'피곤하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늘 그랬으니까.
한 땀, 한 땀. 피부를 맞추고 조였다. 바늘이 들어가고, 실이 당겨지고, 매듭이 지어졌다. 환자의 숨소리가 안정되는 속도와 바늘의 리듬이 맞아떨어졌다.
열 번째 바늘을 넣을 때, 시야가 잠깐 흐려졌다. 상처 가장자리가 번졌다. 눈을 깜빡였다. 다시 선명해졌다.
'괜찮아.'
열다섯 번째 바늘. 손목이 뻐근했다. 어깨가 무거웠다. 목 뒤쪽 근육이 돌처럼 굳어 있었다.
'조금만 더.'
스물 번째 바늘. 손목에서 어깨까지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근육이 굳어 있었다.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어깨가 삐걱거렸다.
스물다섯 번째 바늘. 등에서 땀이 흘렀다. 차가운 땀이었다. 가운 안쪽으로 흘러내렸다.
'조금만.'
서른 번째 바늘. 마지막 매듭을 지었다. 실을 자르는 가위 소리가 또렷했다.
"끝났어요."
시계를 봤다. 새벽 네 시.
아니, 세 시였나. 시침과 분침이 겹쳐 보였다. 눈을 비볐다. 시계를 다시 봤다.
네 시가 맞았다.
한 시간이 지났다. 네 명의 환자. 한 명당 십오 분.
빠른 편이었다.
차트를 쓰려는데, 펜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글씨가 평소보다 흐트러졌다. 왼쪽으로 기울었다. 줄을 벗어났다.
'악필이 되겠네.'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입 끝이 움직이지 않았다. 표정 근육이 굳어 있었다.
차트를 덮었다. 책상에서 일어섰다. 무릎이 휘청거렸다.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괜찮아.'
늘 그랬으니까.
복도를 걸었다. 발이 바닥에 제대로 떨어지지 않았다. 몸이 무거웠다. 다리가 납덩이 같았다. 한 발, 한 발 내딛는 게 버거웠다.
벽을 짚었다. 차가운 타일이 손바닥에 닿았다. 벽을 따라 걸었다. 지지 없이는 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과로겠지.'
늘 하던 생각이었다.
복도 끝까지 걸어가는 데 얼마나 걸렸는지 몰랐다. 시간 감각이 무뎌졌다. 몇 걸음이었는지, 몇 분이었는지. 복도가 늘어나는 것 같았다.
간호사 한 명이 지나갔다. 인사를 했다. 강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뻣뻣했다.
간호사가 뭔가 물었다. 목소리가 멀게 들렸다. 물속에서 듣는 것처럼.
"괜찮습니다."
자동으로 대답이 나왔다.
간호사가 지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탈의실 문을 열었다. 형광등 불빛이 눈에 따가웠다. 눈을 가늘게 떴다. 동공이 빛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사물함을 열자 소주병 하나가 굴러 나왔다. 언제 넣어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제였나, 지난주였나. 한 달 전이었나.
병목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오래되었다.
병을 집으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발끝에서 힘이 빠졌다.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렸다. 균형을 잡으려 했지만 다리가 반응하지 않았다.
손에서 병이 미끄러졌다. 유리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
짱그랑.
날카로운 소리. 병이 깨지는 소리. 파편이 흩어지는 소리.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었다.
쿵.
리듬이 어긋났다. 평소와 다른 박동. 불규칙했다. 약했다.
한 박자 건너뛰고, 두 박자 빠르게 뛰고, 다시 늦게 뛰었다.
'이상하네.'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박수를 세려 했다. 하나, 둘, 셋. 숫자가 헷갈렸다. 넷이었나, 다섯이었나.
시야가 좁아졌다. 주변이 어두워졌다. 터널처럼. 형광등 불빛만 남았다. 나머지는 검게 변했다.
벽을 짚으려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거리 감각이 사라졌다. 팔이 어디 있는지 몰랐다.
'과로겠지.'
같은 생각이 반복되었다. 늘 그랬으니까. 며칠 쉬면 괜찮아질 거였다. 일주일쯤 쉬면. 아니, 사흘이면. 하루만 자도.
무릎이 꺾였다. 버틸 수 없었다. 다리에서 완전히 힘이 빠졌다.
차가운 타일이 얼굴에 닿았다. 이마, 뺨, 턱. 온도가 피부로 전달되었다. 타일의 차가움이 뼈까지 스며들었다.
숨이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이 움직이지 않았다.
횡격막을 내리려 했다. 명령이 전달되지 않았다. 신경이 끊긴 것처럼.
심장이 한 번 더 크게 뛰고—
멈췄다.
강진혁은 이상하리만큼 침착했다. 응급실에서 보아온 수많은 얼굴이 스쳤다.
심정지 환자들. CPR을 받던 사람들. 가슴을 누르던 손의 감촉. 부러지는 갈비뼈 소리. 살아난 사람, 살아나지 못한 사람.
그들의 얼굴이 하나씩 지나갔다. 빠르게. 느리게. 시간이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아, 끝났구나.'
판단은 빨랐다. 늘 그래왔듯이.
감정은 없었다. 두려움도, 후회도. 안도도, 슬픔도.
그저 하나의 사실. 심장이 멈췄다는 것. 호흡이 멈췄다는 것.
CPR을 받을 사람이 없다는 것.
의식이 끊겼다.
소리가 사라졌다. 형광등 소음. 복도의 발걸음. 멀리서 들리던 경보음. 모두 사라졌다.
빛이 사라졌다. 형광등 불빛. 타일의 반사광. 눈앞의 모든 빛. 모두 사라졌다.
감각이 사라졌다. 차가운 바닥. 뺨에 닿은 타일. 손목의 무게. 모두 사라졌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완전한 암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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