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딸인가? 백제 호족의 딸인가?

zzixxa 2007.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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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무왕은 선화공주(통념상 그렇게 말하겠습니다)의 요청에 의해 지금의 익산에 미륵사 또는 '왕이 흥하는 가람'이란 뜻의 왕흥사(王興寺)를 짓기 시작했다. 미륵사는 미륵불을 모실 도량이었다.

 미륵신앙은 현재 도솔천에 있는 미륵보살을 믿어 죽은 후 극락에 가기를 바라는 상생신앙과 먼 훗날 미륵이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설법할 때 참여하여 구원을 얻으려는 하생신앙으로 나뉜다.

그러나 하생할 때까지 걸리는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빨리 현세에 내려와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중생들을 위해 미륵은 일찍 하생할 것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 미륵사의 터에 미륵삼존불이 나타난 것이다. 미륵이 출현하느 국토에는 전륜성옹이 나타나 정법으로 나라를 다스리게 되어 있었다.

이는 곧 현재의 왕이 전륜성왕이고 무왕이 정법으로 다스리는 낙토가 백제라는 뜻이었으니 무왕으로서는 익산에 거래한 미륵사를 세우려는 왕비의 계획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왕비는 나아가 익산으로 도읍까지 옮기려 했다. 그래서 미륵사지 남쪽에 궁성 축조공사를 벌였다. 현재 익산시 금마면과 왕궁면 일대였다.그러나 미륵사지 축조는 몰라도 도읍까지 익산으로 옮기려는 왕비와 무왕의 계획은 쉽게 성사될 수 없었다. 호족들의 반대가 극심했기 때문이다. 백제에는 왕도 어쩔 수 없는 대성8족(大姓8族)이라는 지배집단이 있었다.

중국사료들은 백제의 대성8족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그중 <수서(隨書)> 백제조를 보면

"백제에는 여덟 씨족의 대성이 있으니 사씨(沙氏), 연씨(燕氏), 협씨(협氏), 해씨(解氏), 진씨(眞氏), 목씨(木氏), 국씨(國氏), 백씨(백氏)이다"
라는 구절이 있다. 이들이 바로 백제의 지배집단인 호족들이었다. 이런 호족들의 권력은 도읍지가 어디내 하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한성시대에는 진씨, 해씨 등과 같은 왕비족의 힘이 강했는데, 웅진시대에 이들 외에 백씨, 연씨, 사씨, 목씨 등이 새롭게 대두됐다. 이들은 웅진 지역 토착 토호들이었던 것이다.

사비성(부여)이 도읍지인 이때는 사씨, 즉 사택(沙宅)씨가 정치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사택씨의 기반이 금강유역이었기 때문이다. 무왕의 왕비 선화공주가 익산에 미륵사를 세우고 도읍지까지 옮기려 한 이유도 익산이 그녀의 친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왕 또한 처가의 지원에 힘입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기에 천도에 찬성했던 것이다.

선화공주와의 세기의 로맨스로 잘 알려져 있는 무왕은 어린 시절 마장수였다. 왕실의 피르 이어받은 그가 마장수 노릇을 해야 했던 것은 당시 약화된 백제 왕실의 처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삼국유사>는 무왕의 출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백제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모 속의 용과 관계하여 장을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었는데 재주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그러나 <삼국사기>는 그 아버지가 못 속의 용이 아니라 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두 사료를 종합해 보면 서동은 백제의 왕자로 태어났으나 왕실의 권위가 극도로 약화된 사비시절인지라 갖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마를 팔아 살아야 했던 불우한 왕족 서동이 끝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은 선화공주와의 결혼이었다.<삼국유사>에 실린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는 대략 이렇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은 서동은 마를 주어 사귄 서라벌 아이들에게 이런 노래를 부르게 한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이를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네"

이 노래는 얼마 안 가 신라 서울 안에 잔뜩 퍼져 드디어 대궐에까지 들어갔다. 시집도 가기 전에 신분도 낮은 서동과 사통(私通)한 공주를 용납할 수 없었던 신하들이 격렬하게 간재하자 진평왕은 그녀를 먼 지방으로 귀양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왕후는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귀양길을 떠나는 공주에게 서동이 뛰어나와 절을 하면서 호위를 자청했는데 공주는 이상하게도 서동이 마음에 끌려 이를 허락한다. 드디어 남 몰래 관계를 맺은 후에야 공주는 그가 서동이라는 사실을 알고 노래가 맞았음을 깨닫게 됐다. 백제에 와서 함께 살아갈 길을 논의할 때 공주는 순금을 내놓으며 "이것이면 한평생 부자로 살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말을 들은 서동은 놀라면서 어릴 때 마를 캐던 데에 이런 것이 많다고 답했다.

크게 놀란 공주가 산더미 같은 금을 부모님 계신 궁전으로 보내자고 하자 이에 동의한 서동은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에게 금을 보낼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하룻밤 사이에 귀신의 힘으로 신라 궁전으로 날라 주었는데 이를 신기하게 여긴 진평왕이 더욱 존경하면서 늘 편지를 띄어 안부를 물었고 서동이 이로 인해 인심을 얻어 백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둘의 결혼에 대한 <삼국유사>의 내용이다.

그런데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이 아니었다. 당시 백제와 신라는 극도의 증오심이 수반된 전쟁 중에 있었다. 이 전쟁은 한강 유역 확보라는 서로 양보할 수 없는 국가의 이익을 둘러싼 싸움이자 선왕의 죽음과 복수라는 의리를 둘러싼 싸움이었다. 백제 왕실에게 신라 왕실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백제 왕실이 백제의 토착 호족들에게 맥 못추고 휘둘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신라 임금 진흥왕의 배신 때문이었던 것이다.

진흥왕 이전에 백제의 원수국은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였다.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개국 이래로 5백여 년 간 수도였던 한강 유역과 한성을 빼앗기고 금강 유역의 웅진(공주)으로 도주해야 했다.

개로왕이 비참하게 죽고 한성까지 빼앗긴 백제왕실의 힘과 권위는 크게 추락했다. 지배 호족들은 호시탐탐 약화된 왕권에 도전했다. 추락할 대로 추락한 웅진시대 백제 왕실의 힘과 권위의 공백은 지배 호족들의 음모와 배신을 낳았다. 문주왕과 동성왕이 피살되는 등 정치적 격변이 있따라 그야말로 백제는 멸망의 지경에 다가서게 되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임금이 <삼국사기>가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일에 결단성이 있었다."라고 적고 있는 성왕(聖王)이었다. 즉위하던 해 8월에 고구려 군사가 패수(浿水)에 이르자 성왕은 좌장(左將) 지충(至忠)에게 명해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출전해 이를 물리친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 고구려와 맞서 싸웠다.

그가 재위 16년(538년) 도음을 사비로 옮긴 것은 음모와 배신, 그리고 내란의 땅인 웅진을 벗어나 대제국 백제의 옛 위상을 되살리기 위함이었다. 그가 국호를 '남부여'로 고친 것은 웅진시대의 어두운 유산을 모두 정리하고 만주의 부여에서 시작되는 역사적 정통성을 새롭게 각인시켜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성왕은 해상제국 백제의 부활을 위해서는 한강 유역의 탈환이 급선무라고 보고 있었다. 그래서 신라 진흥왕과 연합해 서기 551년 한강 유역을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장수왕의 남진으로 한강 유역과 한성을 빼앗긴 지 76년 만에 거둔 장거였다. 이로써 백제는 해상제국의 옛 영광을 재연할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다른 배신이 기다리고 있었다. 2년 후 신라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이 지역을 빼았아버린 것이었다. 한강 유역은 원래 백제 땅이었으므로 백제에서는 이를 구토(舊土)의 수복(收復)으로 보고 있었다. 신라에서 이를 가로채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땅을 진흥왕이 나제동맹을 깨고 가만히 가로채 간 것이었다.

이에 격분한 백제는 신라를 공격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이때 신라 공격의 선봉에 선 인물은 성왕의 태자 부여창(扶餘昌:뒷날의 위덕왕)이었다. 부여창은 권신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 공격에 나섰고 성왕은 오랫동안 전쟁을 지휘하는 태자를 격려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전선으로 향했다.

<삼국사기>는 이때 성왕이 신라를 습격하려고 보기(步騎) 50명을 거느리고 전쟁터로 나섰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 궁내성본(宮內省本)<삼국사기>는 보기 50명이 아니라 5천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국왕이 직접 신라를 습격하기 위해 가는 병력이 보기 50명일 수 는 없으므로 보기 오십(五十)은 오천(五千)에서 삐침(/)이 실수로 빠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 보기 5천을 거느리고 출진한 성왕은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가 신라의 복병에게 걸려 싸우다 전사하고 만다. 이것이 유명한 관산성(管山城:충북 옥천)전투인데 백제는 성왕과 좌평 4명, 그리고 사졸 2만9천6백 명이 몰살당하는 커다란 패전을 당한다. 해상제국의 부활을 꿈꾸던 백제는 배신에 더해진 패전으로 거의 멸망 위기에 몰리게 된다. 이 패전은 백제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갔다.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에 나섰다가 참패를 당하고 부왕까지 전사에 이르게 한 태자 부여창은 왕위를 이어받는것도 쉽지 않았다. 이 패전에 대한 책임 추궁이 잇따랐던 것이다.

<일본서기>는 부여창이 신하들에게 불가에 출가해 성왕의 명복을 빌겠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이는 왕위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성왕의 진장한 명복이 태자가 출가해 비는 염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한을 푸는 길, 곧 신라에의 복수에 있음을 몰라서 부여창이 출가를 말한 것은 아니었다. 이는 왕위 포기를 시사하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렸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일본서기>는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이 그렇게 되면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각축장이 되어 멸망할 것이라고 말리는 바람에 실현되지 않았다고 적고 있지만 이는 백제의 지배세력이 부여창을 즉위시켜 사태 수습을 기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즉위한 위덕왕(威德王)이 고구려, 신라와 치열하게 싸우는 한편 진(陳), 북제(北齊), 수나라에 거듭 사신을 보낸 것은 이들 나라의 권위를 빌려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45년 동안 재위에 있었던 위덕왕으 뒤를 이은 혜왕과 법왕이 불과 재위 2년 만에 사망한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법왕의 아들인 서동이 마장수를 하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것은 정변이 잇따랐던 백제 왕실의 어두운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런 모든 사태의 정점에 있던 사건이 신라 진흥왕에 의한 성왕의 전사였다. 백제 왕실은 성왕의 전사 이후 신라 왕실과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무왕이 재위 42년 동안 총 13차례에 걸쳐 신라와 공방을 벌인 것은 그가 자신의 원수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고 있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 공방은 주로 무왕이 먼저 신라를 공격하는 형태였는데, 무왕과 진평왕이 사위와 장인 사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실제 선화공주가 진평왕의 딸이라면 백제 동성왕(東城王)이 신라 왕족인 이찬 비지의 딸과 결혼한 사실을 적은 <삼국사기>가 이 국혼을 적지 않았을 리 없다.

따라서 서동이 마를 팔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역은 신라 수도 서라벌이 아니라 선화공주의 친정인 익산이었던 것이다. 선화공주는 익산지역 토호의 딸이었고, 혈통은 황자지만 완전히 몰락한 서동을 도와 왕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선화공주는 나아가 자신의 친정인 익산에 미륵사를 세우고 도읍까지 옮겨 백제의 권력축을 이동시키려 했다. 그녀는 남편 무왕이 미륵이 출현하는 국토에 나타나는 전륜성왕으로 만드는 것이 익산 천도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익산에 미륵사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출처 : 이덕일/오국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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