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은 고뇌에 찬 왕세자인가? 아니면 양아치인가?
우리는 양녕대군이 태종의 장남이자 세종대왕의 형님이고 일찍이 아우인 충녕대군의 총명함을 알아 스스로 세자 자리를 물러나고 둘째 아우인 효령 대군이 왕위에 대한 미련을 가지자 충녕의 총명함을 깨우쳐 신흥 왕조 조선의 토대를 굳게 다지는 의미에서 총명한 충녕대군에게 보위를 잊게하여 국가의 초석을 다지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11살인 1404년에 왕세자로 책봉을 받게된다. 그러나 1418년 폐세자가 되어 궐밖으로 내쳐지고 동생인 충녕이 왕이된다.
과연 일부러 광인 행세를 해서 왕위를 물려주려했을까?
세자시절 그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소위 현재 말하는 불량 청소년의 행위란 행위는 다하고 있다. 공부는 뒷전이고 여색을 탐하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해 궁궐담을 뛰어 넘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고 어울리는 부류로는 雜人이 많다고 기록에 나오는데 이들을 궁궐로 끌어들여 진탕 놀기도 하여, 태종이 노하여 세자의 거처를 태종 바로 곁으로 옮기기 조차했는데도 그의 기행은 그치지 않았다.
여기까지가 양녕이 왕위를 충녕에게 물려주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양녕이 일부러 미친척해서 왕위를 물려준다는 목적을 달성했으면 이후의 행위는 일상으로 돌아와 보통 사람이 사는 삶을 살아야 하는게 논리적이다.
그러나 세종은 그럴 때마다 그를 용서해서 양녕이 천수를 누리게하는 것이다. 당시 왕조 사회에서 왕권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생존한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그후 단종이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과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 또한 모두 죽임을 당하는 등 왕위에 조금이라도 위협을 가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목숨을 부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 모두가 인자한 세종에 의해 묻혀 그는 살아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를 살펴보건데 양녕대군이 고도로 깊은 생각을 해서 의도적으로 미친척해서 왕위를 물려 주었다는 내용의 이야기는 그다지 설명력이 높아보이지는 않는다. 현대 정신심리학적으로 그를 분석하면 정확한 결과가 나오겠지만 아마 정신착란의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보인다. 또한 그와 관련되어 죽임을 당한 사람도 매우 많이 존재한다. 그가 가까이 했던 기생이나 잡인들은 대부분 비참한 삶을 마쳤으며, 외삼촌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회. 민무휴 등의 죽음도 그와 관련이 있었으며 그후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자 안평대군을 죽이는데 앞장섰으며 그후 단종을 죽이는데도 앞장을 서 이 두사람을 죽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측면을 보건데 양녕대군에 대한 지나친 미화는 재고할 여지가 있어 보인다. 과연 그는 고뇌에 가득찬 왕세자인지? 아니면 단순히 양아치일 뿐인지? 의문의 여지가 많이 있는 인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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