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사진이야기

사진을 이해하는 기술

zzixxa 2007. 12. 12.
반응형

제가 좋아하는 책 중에 "사랑의 기술" 이란 책이 있습니다. 책의 제목처럼 사랑의 기술에 대해서 지은이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책입니다. 저는 오늘 사진을 이해하는 기술에 대해서 써볼까 합니다. 지금 저의 글을 읽는 여러분보다 결코 제가 사진을 좀 더 이해하고 있다거나, 사진이라는 예술 영역에 대해서 나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내게 아우라를 느낄 만큼의 카리스마를 저는 지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렇게 글을 쓰는 이유는 제가 알고 있는 몇 가지의 사진을 이해하는 기술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고자 함입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좋은 사진을 많이 봐야 한다는 말은  사진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사진" 이란 무엇이며, "나쁜 사진" 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질문에 "두 가지를 나누는 시대는 지났다." 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특정한 사진에 대해서 오직 "내 마음에 흡족하는 사진" 과 "내 마음에 흡족하지 않은 사진" 으로만 나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은 - 예술의 사조로서 볼 때 - Post Modernism 의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찰리 채플린의 Modern Times 가 생각납니다.

자동으로 식사를 "먹여 주는" 기계에 선 찰리 채플린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관계 없이 스프와 옥수수를 먹어야 합니다. 그가 영화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 기계화와 자동화로 인한 폐해라면 사진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 역시 기계적인 매커니즘으로 사진을 이해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Post Modernism 의 Post 는 "탈(脫)" 말합니다.  우리는 모더니즘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사진을 보며 구도와 조리개의 수치, 셔터의 속도, 사용 기종과 필름의 종류, 피사체의 위치, 촬영 시간, 조명 기법 등과 같은 사진을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반응되던 단계 - 기계적인 매커니즘 - 를 버려야 합니다.

故 백남준씨는 인문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예술" 은 "사기"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 대로변에서 뛰어 다니는 퍼포먼스의 전위 예술을 인문주의자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지금 여러분께서는 예술을 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예술을 관념적으로 정의하려고 하는 인문주의자이신가요?

한 사진을 두고, "이건 구도가 수평에 맞지 않아. 그리고 조리개를 한 스톱 더 조였다면 좀 더 선예도를 살릴 수 있었을꺼야. 노출도 맞지 않아. 하이라이트가 화이트 홀이 생길 정도로 광량이 과다로 촬영이 되었잖아." 라고 우리는 관념적으로 정의를 내려선 안됩니다. 가끔 인터넷 상에서 사진을 읽고 있다 보면은 이런 댓글이 하나 둘 눈에 들어 옵니다. "무엇을 찍으시려고 한 거예요?", "이 사진은 왜 이렇게 추천이 많죠?" 그럼 저는 반문을 하고 싶습니다.

"사진가가 무엇을 찍고자 한 것인지 읽고 있는 우리가 알아야만 하나요?" 앞에서 얘기한 것으로 돌아가서, 찰리 채플린을 생각해 봅니다. "그가 먹힘을 당하고 있는 스프와 옥수수를 과연 그는 음미할 수 있을 것인가?" 달리 말해서, "우리가 기계적 매커니즘으로 바라보는 사진을 과연 우리는 읽을 수 있을 것인가?"

제가 사랑하는 친구 중에 저처럼 사진을 취미로 두고 있는 이가 있습니다. 항상 저는 그녀의 사진을 보며 구도와, 노출, 렌즈의 화각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저는 그녀의 사진을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녀의 사진을 찍는 기술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진을 보았을때 "Reading" 을 하느냐, "Teaching" 을 하고 있느냐는 전적으로 당신이 사진을 바라보는 관점에 의해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언제나 사진을 읽는데 중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것은 Post Modernism 이든, Realism 든 간에 사상과 시대를 초월하는 중요성을 가집니다. 사진을 예술로서 볼 때는 관객은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 선입견 등등 자신과 관계된 모든 것을 배제하고 사진 그 자체에만 몰두해야 합니다. 헬뮤트 뉴튼이 벌거 벗고 다리를 벌리고 있는 여자 사진을 찍었을때 그것을 자신의 야한 생각 혹은 경험과 결부시켜서 해석하면 예술이 아닌 포르노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일체의 마음도 존재시키지 않고 그저 사진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느껴지는 원초적인 감정들에 의지하는 법을 깨달을때 비로소 사진을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Anti - Parallelism 이라고 저는 부릅니다. Parallelism 이라는 것은 병행성, 병렬성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사진 작가가 추운 겨울 날 따뜻한 어묵을 팔고 있는 사람을 보고 추위를 이길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사진으로 남겨 두었는데 관람자가 이를 자신의 체험이나 기억과 - 이를 테면 추운 곳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본 것- Parallelism 하여 슬픈 사진이라고 단정지어 버리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진 작가의 의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진을 읽고 있는 관람가의 감상 후 느껴지는 순수한 마음 그 자체입니다. 이러한 순수한 느낌이 Parallelism 에 부딪혀서 훼손되는 것은 사진을 올바르게 읽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식이 있는 한 이러한 Parallelism 에 부딪힐 수 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사진을 보면서 반가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감정에 의해서 사진을 읽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헬뮤트 뉴튼의 사진을 자신의 성적인 체험과 결부 시켜서 "포르노" 로 스스로 이해하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큐멘터리즘, 저널리즘을 가진 사진이라면 읽는 방식을 달리 해야합니다만, 순수 예술로서의 사진을 읽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제가 말씀 드린 "사진을 이해하는 기술" 을 익히신다면 좀 더 높은 안목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대중문화와 엘리트문화는 그 차이가 분명 존재합니다. 대중적인 사진과 엘리트적인 사진의 차이는 관람가의 이해 수준의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대중적인 안목만을 가진 관람가는 어떠한 사진을 보아도 대중적인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습니다. 얼마 전에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사진전에 다녀 왔습니다. 그가 한 말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만일 사람들이 내 사진을 보고 단순히 측은한 감정만 느낀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주는 방법에 있어서 완전히 실패한 것이다."


350D CLUB 줄리어스님 글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