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북방한계선(NLL)의 역사
유엔군, 정전협정 등 고려해 1953년 설정
北, 일방적 경계선 발표… 서해교전 일으켜
북방한계선(NLL)은 정전협정의 안정적 관리를 위해 유엔군이 설정한 해상경계선이다.
유엔군은 1951년 7월부터 2년 동안 북한과 연해수역 협상을 벌였지만 견해차를 좁히지 못해 합의에 실패했다. 그래서 정전협정은 해상경계선 관련 규정이 빠진 채 체결됐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사령관은 1953년 8월 30일 남북 간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대치 상황과 정전협정의 조문 등을 고려해 NLL을 설정했다.
동해 NLL은 육상의 군사분계선(MDL) 연장선을 기준으로 설정했고, 서해 NLL은 서해 5개 도서와 북한 지역과의 중간선을 기준으로 한강 하구로부터 서북쪽으로 12개 좌표를 연결해 그어졌다.
당시 유엔군은 동해와 서해 전역을 장악한 반면 북한의 해군력은 보잘것없었다. NLL은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에서 아군 전력의 초계활동을 제한해 우발적 충돌을 막는 역할도 했다. 그 때문에 북한도 NLL 설정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한은 1973년 10∼11월 총 43차례에 걸쳐 서해 NLL을 침범하는 ‘서해사태’를 시작으로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 이북 수역은 자기들의 연해(沿海)라고 주장하면서 서해 5개 도서를 출입하는 남측 선박이 사전 허가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북한은 1977년 7월 ‘200해리 경제수역’을, 같은 해 8월 ‘해상 군사경계선’을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후에도 북한은 집요하게 NLL 무력화 공세를 펼쳤고 1999년 6월 연평해전과 2002년 6월 서해교전 등 군사적 도발을 감행했다. 서해교전 때 NLL을 침범한 북한 경비정의 기습으로 우리 해군 장병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부상했다.
Ⅱ. 북방한계선北方限界線 northern limit line
(엔사이버 두산백과사전http://logencyber.encyber.com/에서 얻음)
1953년 정전 직후 클라크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 북한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해상경계선.
1953년 7월 27일 이루어진 정전협정에서는 남북한 간 육상경계선만 설정하고 해양경계선은 설정하지 않았는데, 당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이던 클라크(Mark Wayne Clark)가 정전협정 직후 북한과의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설정해 북한 측에 공식 통보한 한계선을 말한다.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NLL'로도 부른다.
육상의 북방한계선은 본래 휴전 당시 남북 양측이 대치해 있던 군사분계선에서 북쪽으로 2㎞ 물러난 지역에 설정된 북측의 한계선으로, 남쪽의 남방한계선과 마찬가지로 이 선(線)의 남쪽 2㎞ 구역 안에는 출입이 통제된다. 즉 남북 양측의 한계선 밖 4㎞ 이내에는 출입이 통제되는 완충지대로서, 이 공간이 바로 비무장지대(DMZ)다. 그러나 군사 전력상 상대국을 감시하기 쉬운 장소로 각종 시설들을 이동시키면서 남측과 북측 한계선 안의 '전초(前哨)'인 'GP'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곳은 800m밖에 되지 않는 곳도 있다.
해양의 북방한계선은 서해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의 5개 섬 북단과 북한 측에서 관할하는 옹진반도 사이의 중간선을 말하는데, 북위 37。 35'과 38。 03' 사이에 해당한다. 1953년 설정 이후 1972년까지는 북한도 이 한계선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준수함으로써 남북 사이에 별다른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1973년 들어 북한이 서해 5개 섬 주변수역이 북한 연해라고 주장하면서 이 수역을 항행하려면 사전 승인을 받으라고 요구하는 한편, 빈번히 북방한계선을 넘어옴으로써 남한 함정들과 맞닥뜨리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국제법적으로도 영해를 규정하는 경계선은 아니라는 것이 국제법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한국 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유엔사령부가 NLL 확정에 대해 통보했을 당시 북한 측의 분명한 이의 제기가 없었고, 20여 년 간 관행으로 준수해 왔으며, 1992년 체결한 '남북기본합의서' 11조의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는 점 등을 들어 이를 침해할 경우 명백한 정전협정 정신 위반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북방한계선을 일컬을 경우 이 해양 한계선을 가리키는 것은, 이 해양 북방한계선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남북 양측의 빈번한 충돌과 대립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주요 논란거리로 도마 위에 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Ⅲ. 북방한계선의 역사를 모르면 그 입 다물라!
현봉(온오프에서 얻음. http://www.myonoff.com/bbs/tback.php/c1100/18585)
1. 클라크선의 유래
클라크선이란 1952년 4월 28일부터 1953년 9월 10일까지 미군 총사령관 겸 유엔연합군총사령관인 마크 W 클라크 육군대장의 이름을 딴 선입니다.
이 선이 유지된 것은 정확히 1952년 9월 27일이고, 철폐된 것은 1953년 8월 27일입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는 사실인데 이 기회에 많은 분들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1951년 7월 10일, 시작된 정전협상이 부진하고, 새로 참전한 중국군의 대공세로 수세에 몰린 유엔군은, 중국과 조선에 대한 압력을 강화해야할 필요가 커졌습니다.
외국무기 물자와 보급지원을 차단함으로써, 미국은 자신의 조건에 맞는 조건을 최단 시일 안에 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려 했고 그 때문에 중국과 조선에 대한 해안봉쇄를 실시하고 유엔총회에 그 승인을 요청하였습니다.
미국정부의 해안봉쇄안은, 유엔으로 하여금 모든 회원국가와 중국ㆍ조선 사이의 교환을 완전 금지하고 자국의 해군함정이 해안봉쇄선 안에 들어오는 모든 국적의 선박들에 대해서 나포까지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1주일 전에 선을 긋고 실제적인 봉쇄종치를 시작한 상태로 사후적 정당화를 하려한 것입니다. 하지만 중국 본토에 대해서는 러시아 등 많은 나라가 반대를 하여 유엔에 의한 승인은 받지 못했고 미국 실력으로 조선 해안만 봉쇄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곧 여기에서 클라크선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중, 한국과 조선 사이의 해상전투행위의 어떤 분계‘선’, 완충‘선’, 또는 완충‘지대’ 등을 목적으로 설치됐던 선이 아니라 조선인민군과 중국지원군의 전력약화를 기하고 상대방에 대해 미국의 안대로 정전협정을 수락하도록 압력을 가하기 위한 "해상봉쇄선"인 것입니다.
2. 클라크선의 존폐여부
클라크라인이 집행되기 시작한 지 10개월 후에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그 협정의 "제2조 정화 및 정전의 구체적 조치, A 총칙, 15항"으로 미국과 중국, 조선은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습니다.
제2조 15항 : 본 정전협정은 적대중의 일체의 해상군사력에 적용되며, 이러한 해상군사력은 비무장지대(육지)와 상대방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조선의 육지에 인접한 해면(海面)을 존중하여, 조선에 대하여 어떠한 종류의 봉쇄도 하지 못한다.
조선은 정전협정 조인(53. 7. 27) 날까지도 조선의 전체 해안을 실제적으로 봉쇄하고 있던 미국에게 협정 발표 후의 해안봉쇄의 불법 부당성을 지적했습니다. 이 요구에 미국은 이에 동의했을 뿐입니다. 조선의 요구를 들어줘서 선정되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이미 확인한 휴전협정 제2조 15항입니다.
이 합의 규정에 따라서 클라크 유엔총사령관은 1개월 뒤인 1953년 8월 27일에 자신의 이름으로 설치를 발표했던 "클라크라인"의 철폐를 발표했고, 53년 8월 27일, 11개월간의 존재를 마감하고 소멸됐습니다.
6 25전쟁 기간 중 한국과 조선 사이의 바다에 그어졌던 선이 정전협정 제2조, A. 총칙, 15항의 규정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3. 종전 후 이승만대통령의 지속적 공격과 미국의 대응
이승만은 종전을 인정할 수 없었고, 공격을 자제하라는 미국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중국군 포로를 모두 풀어주어 중국의 강한 항의를 받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태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처음엔 달래고 나중엔 압박조치까지 합니다. 우선은 달래기 위한 당근정책입니다.
한ㆍ미 방위조약의 체결(한미방위조약 인준 : 1954. 1. 19).
평화협정 협상의 기한 설정과 협상 실패 등의 한국군 증강 종합계획 실시(1954년 5월 6일 부터).
남한 전후복구 부흥을 위한 경제원조, 지원계획의 실시.
이승만을 압박하기 위한 정책은 또한 다음과 같습니다.
▶ 특별평가보고서와 SF-48,
1953년 10월 16일,
리(승만)는 현 상태에서 자기가 공산군에 대한 일방적 군사행동을 개시하더라도 미국으로서는 자신의 행동을 저지할 만한 능력이 없다고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뿐이 아니라 더 고약한 사실은, 리(승만)는 자신의 군사공격으로 공산측의 대규모의 군사적 대응행동이 발생하더라도 미국으로서는 한국군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음이 분명하다.
미국이 별수 없이 전쟁에 끌려 들어올 것이라는 가능성이 몇 천분지 일이라도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리(승만)는 미국이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라도 자기를 전면적으로 지원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으로 그런 행동을 감행할 것으로 확신한다. 그 반대로, 만약, 자기가 시작한 한국에서의 전쟁재발에 미국을 끌어들일 수 없으리라고 깨닫게 되면 그 때는 공산측에 대한 일방적 군사공격을 단념하리라고 믿어진다. 군사공격 개시의 희망이 사라지면 그는 (정전협상에서 합의한) 앞으로의 정치회의에서 한국에 불리한 결의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미국의 보호군대가 남한에 계속 주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정치회의의 진전을 방해하는데 전력할 것으로 믿어진다.
▶ 국방성과 국무성 및 중앙정보부 공동으로 안전보장회의에 보낸 문서 (대리 응징 계획안)
1953년 11월 2일
한국문제의 적절한 정치적 해결이 불가능할 경우의 미국의 한국에서의 행동방향
1. 남한이 정전협정의 비무장지대 내외 또는 그 북쪽에 있는 중국군이나 북한군에 대해서 일방적 군사공격행위를 감행할 경우에는 리(승만)와 그밖에 한국군 지휘관들에게 즉각 다음의 사실을 통고할 것.
a. 미국의 육군 해군 공군은 그런 행동을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일체 지지하지 않는다.
b. 미국은 그런 군사행동에 대해서는 일체의 군사적 또는 물자적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
c. 미국의 일체의 경제원조가 즉각 중단된다.
d. 모든 유엔군 산하 부대 지휘관들은, 휘하 장병들이 그 같은 교전상태의 재발에 말려들지 않도록 함과 동시에 그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인정되는 일체의 조치를 취한다.
2. 이런 조치와 동시에, 미국은 이승만으로부터 비무장지대의 안위 또는 그 북쪽에 있는 공산군에 대해서 앞으로 절대로 일방적인 군사행동을 감행하지 않겠다는 뜻을 문서로 기술한 서약서를 받아낸다.
이런 문서를 바탕으로 하면 다음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서해상에서의 전쟁재발 가능성에 관한 한, 미국은 남한 쪽의 계획적 군사도발을 훨씬 두려워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북방한계선”이라는 명칭을 아는데 더 가까워진 것입니다. 북방한계선이란 명칭을 더 잘 알기 위해서 다시 다른 사실을 확인해봅시다.
“(정전협정의 지도 1ㆍ2ㆍ3을 들어 보이면서) 어디에 선이 있는가. 서해 5도 지역이 유엔군 사령관 통제 아래에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영해 3마일의 선을 그었을 뿐이다. 북한이 3마일 안에 들어오면 위반이라는 표시다. 북한은 12마일을 주장하고 우리는 3마일을 주장해서 정전협정에 해상분계선을 못 만들었다. 영해가 몇 마일이라는 규정도 없이 흐리멍텅하게 돼 있다. 당시 합의를 못했기 때문이다. 북방한계선이라는 용어 자체가 남측에서 그 선 이북을 가지 말라는 것이었지 북쪽에서 내려오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었다.”(이문항 前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4.북방한계선(NLL)의 탄생
미국의 정책은 크게 세 가지였고 나머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해에서의 한국해군 행동규제 : 한국(남한) 군대의 육지 비무장지대 넘어서와 서해에서 조선 해안에 대한 군사적 침투 공격 등 일방적인 군사행동을 방지하는 조치로서 유엔군사령부는 서해에서의 한국 해군 행동의 북방한계를 대체로 이전의 대조선 ‘해상봉쇄선’(클라크라인, 1952년 9월 27일 설치-1953년 8월 27일 철폐)으로 제한한다.
일부 학자들이 대표적으로 1953년 8월 30일에 유엔군총사령관의 통보가 있은 것처럼 추정 내지 주장하고 있으나 확인된 바 없고, 유엔군사령부는 이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내가 판문점에 근무했던 66년부터 94년까지 한 번도 NLL을 들어 북한을 비난한 적이 없다. 정전위가 마비될 때까지 회의석상에서 NLL 위반 문제가 단 한 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서해상에서 충돌이 벌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유엔사가 NLL이 그려진 지도를 들고 회의장에 들고 나와 (북측에) 입장을 말한 적도 없다. NLL이 있었다면 가능한 일인가. NLL은 클라크 사령관 당시 2급 비밀로 분류됐던 군작전지도 상에만 표시됐다.”(이문항 前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북방한계선의 합법성이나 정당성을 한국측 입장에 서서 주장하고 있는 김현기교수(경기대학교 정치전문대학원)도 이 주장(07년 이후 주장) 전에 확인된 바 없고 유엔군사령부가 부인하고 있다는 점을 시인하고 있습니다.
또한 양국간의 정전협정 변경은 다음과 같이 정해져 있으니 유엔군이 통보를 할 가능성도 없습니다.
정전협정 제5조 부칙
61. 본 정전협정에 대한 수정이나 증보는 반드시 조인 쌍방 사령관들의 상호합의를 거쳐야 한다.
근거 없는 상상이라고 할 것입니다. ‘북방한계선’은 정전협정 위반으로 보는 게 타당한 것입니다.
사례를 더 붙인다면 한반도 주변 해역(동ㆍ남ㆍ서해)에 전쟁 중인 1952년 1월 18일에 선포한 소위 ‘이승만라인’의 영평도-대청도-소청도의 연결선 밖으로 올라가 한ㆍ중 국경의 압록강하구 서단과 접하는 직선으로 조선의 서해안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인정받지 못하고 철폐되었습니다. 마찬가지 조선의 일방적 선포인 서해의 ‘군사경비선 구역’도 철폐되었죠.
5. 정리
이것이 현재 남ㆍ북 사이 NLL을 둘러싼 사실의 정리입니다. 1953년 8월 30일 유엔으로부터 연락이 왔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고, 군 내부적으로 한국군을 통제하기 위해서 설정된 내부방침이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설사 연락이 왔더라도 법적의미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정전협정의 어느 일부에 대한 수정이나 증보는 협정조인 쌍방 당사자 간의 공식통보와 합의가 있어야 하지만 합의가 없었고 유엔군사령부도 이 사실을 시인하지 않고 있고 공식입장도 확인했습니다.
유엔군사령부는 남북해군 충돌사건 이후에도 판문점 정전위원회에서나,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나 ‘북방한계선’이 합법적이라는 공개적 발표를 한 적이 한 번도 없고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일 뿐입니다. 다시 증언을 확인한다면,
“70년대 말인가, 한ㆍ미연합사 작전참모를 하던 미군 소장이 어느 날 ‘NLL이 무엇이냐’고 내게 물었다. 브리핑을 요구해서 설명을 해줬다. 나중에 사령관에게도 브리핑을 했다. 그들 또한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92년부터 정전위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90년대 말쯤 판문점에서 정전위 장성급 회담이 열린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한국측이 NLL은 기정사실화된 경계선이라고 주장하자, 북한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미군 대표는 이때 한국측의 말을 지지하지 않고 ‘그것은 앞으로 남ㆍ북 간에 더 논의해서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당시 회의록을 내가 갖고 있다.”(이문항 前유엔군 사령관 특별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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