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역사이야기

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을까?

zzixxa 2013.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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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과연 폭군이었을까?
 
 


조선 역사상 이름에 '군'자가 들어간 왕이 두 명 있었는데, 바로 연산군과 광해군이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을 폭군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연산군을 폭군으로 이야기하는 데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동의한다. 그러나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좀 다르다.

광해군은 폭군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광해군을 다시 이야기 해보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 광해군은 어떤 왕이었을까?  

대동법의 기틀을 바련한 왕 광해군


누구나 대동법이란 말을 중·고등학교 국사시간에 들었을 것이다.
 
공납제, 즉 그동안 궁중에서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물을 모든 가구에 하나씩 부과하던 제도를 토지 가진 사람에 한해서 토지 한 결당 16말씩(후에 12말이됨)부과하도록 바꾼 것이 대동법이다.
 
이 대동법은 조선 역사상 가장 개혁적인 법 중 하나다. 공평과세의 초석이 된 데에다 더 나아가서 조선후기 상업 발전에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동법의 의미는 이것만이 아니다. '대동大同'이라는 말은 유교 경전인 <예기>에 나오는 말로, 모두가 잘사는 사회, 즉 이상사회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대동법이란 이상사회를 만드는 법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대동법은 당시 공납제의 폐단에 시달리던 가난한 농민들을 구제하는 획기적이고 이상적인 제도였다.
 
당시 공납제의 폐단은 극심했다. 공남제는 조정에서 각 지역에 공물을 부과하면 지역의 수령이 다시 주민들에게 가구당 하나씩 공물을 부과하는 형식으로 운영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많았다. 수령들과 권새가들이 결탁해서 자신들은 값싼 물건을 내고, 힘없는 백성들에겐 구하기 어렵고 비싼 물건들을 내도록 했다. 따라서 공납제의 부담은 모두 가난한 백성들이 지게 되었다.

더욱이 공물은 지역특산물로 부과한다는 처음의 원칙과 달리 지역특산물이 아닌데도 부과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인삼이 공물로 책정된 지역에서는 인삼이 나는 황해도 지방으로 가서 구해야 했고, 강원도 해안지방의  경우 태풍으로 오징어잡이를 하지 못해도 기일까지 무조건 내야 했던 사례들이 실록에는 여러차례 나온다.
 
이렇게 물건을 구하기 어려워 지자 방납인放納人이라는 것이 생겨났다.물건을 대신 구해주고 그 대가를 쌀이나 포로 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이 터무늬없이 비싼 물건값을 요구하면서 방납의 폐단은 극심해져갔다. 쌀 9말이면 구입할 수 있는 꿀 한 말을 방납인이 대신 구해서 내준 대가로 쌀 21말을 내야했고 심지어 생선 한 마리에 쌀 10말을 내야 했다.
 
이렇게 공물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제떄 공물을 내지 못하는 농민들이 늘어나고, 지방 수령들의 독촉에 못 이겨 일부 농민들은 집을 떠나 유민이 되기도 했다. 결국 걷히는 공물의 양도 줄어들고, 국가 재정에도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러자 광해군은 이 두가지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 위해 한백겸과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대동법 시행을 결심한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은 쉽지 않았다. 당시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던 당대 권세가들과 방납인들의 반대가 극심했기 떄문이다. 이들은 지방에서 거둔 많은 쌀을 한꺼번에 한성으로 옮기겨면 많은 문제점이 생길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즉위하던 해 경기도 지역에 대동법을 시범적으로 시행한다. 이렇게 처음 실시된 대동법이 이후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데에는 100년이란 세월이 걸린다.
 
100년이란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던 건 즉위하던 해에 과감히 경기도 지역에 대동법 시행을 결정했고, 이후 경기도 지역 지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동법을 유지해온 광해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허준의 <동의보감>과 광해군

<동의보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광해군 때 출간된 의학 백과사전으로, 지금도 한의사들에게 기본이 되는 교과서이다.<동의보감>은 그 유명세를 국내에서만 치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발간 당시 중국과 일본에서 극찬을 받았으며, 지금 까지 20여차례나 번역 출간되었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의학백과사전<동의보감>하면 우리는 저자 허준만을 떠올린다. 사실 명의 허준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 <동의보감>이라는 책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그런데 <동의보감>이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데에는 또 한 사람의 공로자가 있다. 그가 바로 광해군이다. 광해군과 <동의보감>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허준이 동의보감을 쓰기 시작한건 선조 29년이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의학책을 만들라는 선조의 명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선조가 죽자 대신들은 선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허준에게 물어 허준을 탄핵한다. 이임금이 죽으면 어의에게 책임을 묻던 시대였다. 선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조의 죽음은 허준의 탓이 아니라며 허준을 보호해 주려 한다. 그러나 극형을 요구하는 대신들의 탄핵이 그치지 않자 광해군은 허준에게 유배령을 내려 탄핵을 일단락 지으려고 한다.
 
유배지에 도착한 허준은 <동의보감>집필에 몰두한다. 낮에는 인근 산을 다니며 약초를 연구하고, 밤에는 책을 썼다. 그러나 대신들은 허준이 유배지에서 근신하지 않고 집 밖으로 다니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고 하며 허준을 위안리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안리치란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쳐 놓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유배형이다.  일부 대신들은 극형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완강하게 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1년 뒤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허준을 풀어준다. 그리고 그가 <동의보감>집필에 몰두할 수 있도록 보살펴준다.
 
광해군의 바램대로 유배지에서 풀려난 디 1년뒤 허준은 <동의보감>을 완성시킨다. <동의보감>이 완성되던날 책을 받아즌 광해군은 "양평군 허준은 일찍이 선왕의 명으로 책을 쓰기 시작하여 유배된 뒤에도 집필을 쉬지 않더니 이제 비로소 책을 완성했다. 실로 비감한 마음을 금치 못하겠다"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이렇게 광해군은 대신들의 집요한 탄핵에도 허준을 보호해 주었고, 그로 인해 <동의보감>이 완성되었던 것이다.
 
그럼 광해군은 왜 그토록 집요하게 허준을 보호해 주었을까?
 
당시는 임진왜란으로 인한 각종 질병과 전염병이 만연하던 시대였다. 누구나 쉽에 읽고 스스로 처방할 수 있는 의학서적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던 때다. 광해군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기강을 바로잡아라!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7년간의 전쟁은 당시 조선의 기본사상인 유교사상마저 뿌리째 흔들리게 하고 있었다. 관련된 사건들을 찾아보면,

"선조가 죽고 난 뒤 국상 중인데도 별궁 근처 민가에서 나는 창가 소리가 임금의 처소에 따지 들렸다."
                                                                                                                           -선조 32년5월

"경상도 의성에는 간밤에 향교가 부서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향교에 모셔져 있던 위패가 더럽혀져서 뜰 가운데 버려지고 문밖에 던져져 있었다."
                                                                                                                            -선조26년12월
 

광해군은 나라의 기강을 바로세우기 위한 일련의 작업들을 시행했다. 우선 즉위하자마자 임진왜란으로 불타 버린 궁궐을 수축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차례로 준공했도, 뒤이어 경희궁을 창건했다. 당시 궁궐 수축을 하는 데 백성들의 고충이 컸다. 
 
그러나 당장 왕이 기거할 궁궐이 모두 불타 없어진 터에 궁궐 수축은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궁궐 수축은 왕실의 권위를 살리고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는 한 방법이었다.
 
광해군은 즉위하던 해 각 고을의 효자와 충신·열녀를 가려내어 포상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명단과 사연을 감아<동국신속상감행실도>라는 책을 낸 뒤 전국에 배포했으며, 집권 3년째 되던 해엔 유교성현들을 문묘에 모시기도 했다. 김광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이렇게 다섯 명을 문묘에 모시고 배향했다.
 
광해군은 또한 전후 복구사업의 일환으로 불타 버린 각종 서적들을 복간했다. 대표적인 것이 <국조보감>과 종합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이다. 또한 실록을 보관하던 충주와 청주사고가 불타 없어지자 산성이 있어 방어력이 뛰어난 적성산성에 사고를 설치해 실록과 중요 서적들을 보관 했다. 이로써 연산군으로 인해 영원히 사라질 뻔한 책들이 지금도 우리 곁에 남아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광해군은 왜 폭군으로 기억되는가?
광해군은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제대로 나라를 다시 세우는데 전념했다.  이렇게 본대면 광해군은 폭군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광해군이 시행한 대동법이나 <동의보감>출간에 담긴 광해군의 의도를 보면 민생을 돌볼 줄 아는 왕이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억하는가? 그건 아마도 영창대군과 인목대비의 일 때문일 것이다. 흔히 폐모살제(廢母殺弟)라고 일컬어지는 일로, 자신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영창대군을 유배보낸뒤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렇다면 광해군은 왜 폐모살제를 하게 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광해군의 즉위과정을 살펴봐야 한다.

파란만장했던 광해군 즉위과정
광해군은 선조의 세 번째 아들이자 후궁의 아들로 왕위에 오를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런만큼 왕위 계승과정은 파란만장했다.
 
선조에게는 정실부인인 의인왕후가 있었다. 그러나 의인왕후에게서는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다. 때문에 선조는 세자책봉을 차일 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나 선조의 나이 40을 넘기게 되자 후궁 소생중에서 왕세자를 책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당시 왕세자로 거론된 인물이 임해군·광해군·신성군이다. 그러나 후궁 소생 중 장자라 해서 왕세자로 거론되었던 임해군은 성격이 난폭해 일찌감치 왕세자 논의에서 제외된다. 그리고 광해군과 신성군 두 사람이 왕세자 후보에 오르게 되는데, 당시 선조는 자신이 총애하던 임빈 김씨소생의 신성군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게 된다. 상황이 급박해진 선조는 당시 신성군이 아직 어리다 하여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선조는 명나라로 피신하고, 광해군은 조선에 남아 일본에 대항한다. 당시 광해군의 활약은 대단했다. 이로 인해 조선 내에서 왕세자로서의 광해군의 입지는 굳어졌다. 그러나 명나라는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뉴로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또 하나의 문제가 생긴다. 전쟁후 의인왕후가 26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선조는 19살의 임목왕후를 중전으로 간택한다. 이때 광해군의 나이는 28살로, 자신보다 9살 어린 어머니를 맞게 된 것이다. 인목왕후는 궁에 들어온지 2년만에 영창대군을 낳는다. 선조는 뒤늦게 얻은 적장자인 영창대군을 특별히 사랑한다.
 
당시 광해군은 명나라의 고명을 받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대신들 중엔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미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대신들중엔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미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왕세자로 미는 대북파로 다시 나뉜다.
 
그런 와중에 선조가 갑작스럽게 죽는다. 선조는 죽으면서 광해군을 왕위에 즉위시키라는 서첩을 영의정 유영경에게 준다. 그런데 유영경을 소북파로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미는 사람이었다. 그는 선조의 서첩을 공포하지 않고 문갑속에 보관한다.
 
이렇게 해서 선조의 어명이 전해지지 않자 결정권은 인목대비에게로 넘어간다. 인목대비는 고심 끝에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영창대군은 아직 나이가 어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이 왕세자로 책봉된지 17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뒤에도 광해군은 명나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결국 진상조서를 하겠다는 이유로 두 명의 관리가 명나라로부터 왔다. 이들이 조선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고 돌아간 뒤에야 광해군은 명나라로부터 고명을 받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다시 왕위에 오르기까지 광해군이 겪었을 마음 고생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음이 있다.


왕위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광해군
이렇게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왕위에 대한 불안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영이어 일어났던 여러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광해군의 형, 임해군이 제거된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당시 임해군은 광해군이 자신의 왕위를 빼앗았다고 공공연히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이러한 임해군에 대한 조정대신들의 탄핵이 끊이지 않는다. 조정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눈치챈 임해군은 도망을 가려던 중 붙잡힌다. 그리고 그 길로 강화도로 유배 보내졌고, 얼마지나지 않아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그로부터 5년 뒤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모하게 되는데, 사건은 엉뚱한 데서 시작된다. 1613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이 발생한다. 그 범인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양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지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당시 내로라 하는 가문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서자 차별에 불만을 품고 윤리가 필요없다는 의미의 무륜당無倫黨이라는 당을 만들어 전국을 다니며 화적질을 했다. 그러던 중 이들이 잡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단순한 강도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들은 문초를 받던 중 인목대비를 웅립하려 했다고 실토한다. 이로 인해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은 일곱명의 서자와 함께 처형당한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권력을 잡도 있던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창대군과 관련있는 소북파를 제거하려는 욕심에서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대북파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만 유배보내는 것으로 일단락지으려 한다. 이는 영창대군에게 사형만든 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광해군의 뜻과는 달리 영창대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임을 당한다. 대북파이 거두 이이첨이 강화부사를 시켜 영창대군을 방에 가둔뒤 불을 때 데워 죽인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대북파는 인목대비 또한 역모사건에 관련이 있으니 폐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광해군은 폐위를 반대했지만 끈질긴 대북파의 주청에 못 이겨 영창대군이 죽은 뒤,5년만에 인목대비를 폐위한다.
 
이렇게 해서 광해군은 폐모살제한 왕이 된다. 그의 즉위 과정과 폐모살제 과정을 살펴보면, 이는 대북파의 정권야욕과 광해군의 왕위에 대한 불안함이 빚어낸 비극의 사건이었다. 어찌되었든 이것은 광해군에게 씻을 수 없는 오명으로 남게 되고, 광해군은 많은 정적(소북파와 남인 서인들)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다.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왕, 광해군
1623년 3월 23일 새벽
무장을 한 수백명의 무리들이 창덕궁으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순식간에 창덕궁을 점령했다. 이른 바 반정이었다. 이들 반정군의 중심세력은 당시 광해군 정권에서 소외외었던 서인 세력이었다. 이들 중엔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도 있었다. 이들은 창덕궁을 점령한 뒤 바로 이이첨과 정인홍 등의 집권 대북파들을 체포했다. 그리고 소식을 듣고 변장을 한 뒤 안국신의 집으로 피신해 있던 광해군도 체보판다. 하룻밤 사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인조다. 그리고 정권은 대북파레서 서인으로 넘어갔다. 이때 인조반정을 일으킨 이들은 광해군을 내쫓는 명분으로 폐모살제를 내세웠다.
  이후 조선시대 내내, 그리고 어쩌면 지금까지 광해군은 폐모살제한 폭군으로 우리에게 인식되어왔다. 사실 유교사상을 근본사상으로 삼고 있던 조선시대에 폐모살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당시 일반백성들에게 광해군을 내 쫓는 명분으로 폐모살제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과연 폐모살제는 광해군을 내 쫓는 명분이 될 수 있는가? 동·서를 막론하고 중세정치사에서 왕의 혈족을 제거하는 건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태종도 왕자의 난을 통해 배다른 형제들을 숙였으며, 세조도 단종을 영월로 유배보낸뒤 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들 세조나 태종을 폭군으로 하지 않고 유독 광해군만을 폭군으로 기억한다. 이는 아마도 역사적인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는 광해군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물론 광해군에게도 문제가 있었다. 왕위에 대한 불안함으로 자신을지지하는 대북파만을 등용하고, 소북파와 서인·남인들을 제거해 반정의 불씨를 제공했다. 어쩌면 이것은 왕위 계승에 정통성을 가지지 못했던 광해군의 한계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광해군은 임진왜란 직후 정신적·경제적으로 황폐해 있던 조선을 다시 세우기 위한 작업들을 과감히 추진해 나갔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었던 엇이다.
 
지금 우리가 광해군을 더 이상 폭군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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