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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대학살 생존자들의 증언

zzixxa 2009.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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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쯔강가 상원문에 일본군의 난징대학살 초혜협 추모비 가있다.

이 기념비의 비문은 아래와 같다.

 

일본군의 난징대학살 초혜협 추모비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공격하여 점령한 이후,  나는 수 많은 피난민과 이미 무장을 해제한 군인들과 같이 강을 건너기 위해 샤관 옌장에 있는 지역으로 피신했다.

여기서 모두 5만 7천 여명이, 일본군에 붙잡혀, 막부산 아래의 45개 마을에 집중되어 수감되었다.

 

계속되는 일본군의 참혹한 학대로 인해, 추위와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갔고, 이어서 18일 밤에는 모두 포박되어 초혜협까지 압송되었으며, 그곳에서 기관총으로 집단 사살되었다.

소수의 부상자와 죽지 않은 사람은 다시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죽은 후에는 불을 놓아 시체를 태우고, 잔해는 모두 강에 투기하였다.

 

그때 죽은 사람을 슬펴하여, 도살용 칼이 향하는 바, 산하가 피에 물든다. 희생자들은 어찌하여 이런 피해를 당해 여기 모셔져야 하는 걸까?
이런 일을 추념하는 것이, 어찌 아픔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이 비석을 세워, 삼가 그 슬픔을 표하는 바이다.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더 한층 분발하고 노력해야 하며, 이에 겸하여 옛일을 영원히 그 귀감으로 삼는다. 
 

스밍(石明)의 증언

 

 1937년 나는 국민당 제5군 36사단 108여단 215단의 소형포를 담당하는 일등 포수였다. 상하이가 함락된 후, 난징 화평문의 모든 일을 정지하고, 철수 명령을 받은 후, 우리는 중산 부두 강가에 도착해 강을 건너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공무원들까지 피신을 할 때였으므로 우리는 이태리제 소형포를 강물에 던져 버리는 등, 부대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강가에는 만 명 정도의 사람이 있었으므로, 하루만에 모두 건널 수가 없어 대기하고 있었다. 오후가 되어, 일본군이 강가에 도착했고, 이곳 만 명의 사람들 모두 포로가 되었는데, 이 안에는  많은 피난민들이 섞여 있었다. 일본군은 우리를 마치 새끼 돼지 잡듯 체포하여, 초혜협에 서둘러 도착하자 대학살을 시작했다.

 

먼저 기관총을 사용하여 일소한 후, 다시 총검으로 찔렀고, 군중 속으로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그 당시에, 나는 머리에 기관총을 맞아 10여 센치 정도의 큰 균열이 생겼다. 시체더미에 쓰러져 있는 나를, 일본군은 또 다시 총검으로 찌르기 시작했다. 얼굴, 왼쪽 옆구리, 왼쪽 팔아래, 등을 각각 한번씩 총검에 찔렸다.

 

모두 중요한 부위를 피해 찔렸기 때문에, 다행히도 죽음을 피할 수가 있었다. 한밤중이 되어 같이 박해를 당한 사람들의 시체더미로부터 빠져 나왔다. 어둠을 틈 타 이곳을 떠날 생각으로 산차허(三汊河) 부근의 한 빈집 안으로 들어가서, 채소를 절이는 장독 옆에 숨어 있다가, 이내 의식을 잃었다. 

 

저녁이 되어, 한 노인이 내 온몸에 흥건히 흐르는 피를 보고는 죽었다고 여겼는지, 나를 끌어 당겨 보았는데, 내가 한마디 중얼거리자 놀라며 그가 말하기를, "어서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날이 밝아 일본 놈들에게 또 잡혀간다." 고 하였다. 나는 어둠을 틈 타 샤오단양에 도착하였으며,  비로소 살아 남을 수 있었다.

   

갈사곤(葛仕坤, 거스쿤)의 증언

  

 나는 거스쿤이라고 하며, 올해 74살(주; 2005년 당시)이다. 일본군이 난징을 치기 전날 밤, 우리가족 모두는 옌쯔지의 쉬쟈춘으로부터 강북으로 이사했다. 하지만 나는 늘 옌쯔지의 마을로 돌아오곤 했다. 1937년 12월 하루를 기억하고 있다. 나는 쉬쟈춘 웨량산 위에서, 일본군이 중앙군 400여 명을 포박해 울부짖는 그들을 억지로 땅바닥에 무릎을 꿇리고, 기관총으로 전부 사살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우룽산에서부터 쉬쟈춘까지 전부 시체로 뒤덮여 있었고, 행인들은 길이 시작하는 곳에서부터 시체를 밟고 지나가야 했다.  우리 마을의 촌장 주명욱은 큰 길가에서 사람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하고, 죽은 사람을 묶어 그 자리에서부터 매장하기 시작하였는데, 10곳인가의 땅에 시체를 묻었다. 나는 6,7명의 일본인이 갈 성을 가진 한 여자를 우리집까지 끌고 와 윤간하는 것도 직접 목격했다.

   

곽국강(郭國强, 궈궈챵)의 증언

 

곽국강은 1936년 18세에 '중앙군'에 들어가 88사단에 복무하였다, 그의 부대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하자 이에 저항하다 패전하였고, 패전 후에는 장쑤, 쥐룽에서 또한번 일본군과 맞서 싸운 후, 이 전투에서도 패전하자 다시 전열을 가다듬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1937년 12월 곽국강은 2,300명의 중앙군과 함께, 평복으로 갈아입고, 난징 옌쯔지의 삼태동(三台洞)부근으로 도망쳐 옌쯔지의 개펄에서 자행된 대학살 광경을 직접 목격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기관총이 하루내내 발사되었고, 여기서 2만여 명의 무장을 해제한 중앙군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막부산으로부터 연자기(옌쯔지)에 이르는 강가에는, 상원문이나 관음문으로부터 피난해 온 군인이나 일반인들이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이 집결하고 있었다. 몇천 몇만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강을 건너려는 것이다. 일본군이 벌써 추격 해 와서, 중산부두, 석탄항 근처에서 격렬한 총성이 났고, 파도소리와도 같이 큰소리로 울부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피난해 온 사람들은 집오리떼처럼 한덩어리가 되어 하류 쪽으로 모이게 되어 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었으며, 격렬한 파도에 밀려 물가로 기어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울부짖거나 놀라 공포에 떨며, 퇴로를 잃은 사람들은 강가에서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 때, 곽국강은 삼태동에 숨어 있었는데, 돌연, 연달은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총성은 1시간 이상 계속된 후 잠깐 멎었고, 이어서 일본군이 산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동굴에서 나오지 않으려 하자, 일본군은 동굴 안쪽을 향해 총을 발사했다. 수류탄을 던져 넣기도 했다. 폭음이 잦아들자, 바위 동굴안에는 사람의 피와 고기가 흩날렸고, 입구에서는 흰 연기가 피어 올랐다.

 

그가 바위 동굴에서 빠져 나오니, 무시 무시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져 있었다. 산아래 도로로부터 강가 사이에 엄청난 시체가 구르고 있었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연자기에, 강을 건너던 남녀노소 모두가 학살되어 가로놓여 있었던 것이다. 건륭제의 손으로 쓴 '연자기' 석자를 크게 새긴 비 위에도 선혈이 낭자했다. 산을 빠져 나오자 도처에 시체가 겹겹이 쌓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벼랑의 고목 위에도, 나무의 과일로 전락한 사망자의 시체가 걸려 있었다.

 

흙도 바위도 개울물도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난징의 명승지인 연자기는 도살장으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기관총 발사 때, 적지않은 사람이 벼랑에서 강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한다.

   

진덕귀(陳徳貴, 천더궤이)의 증언

 

진덕귀씨는 1937년 19살이던 12월 14일 화기양행(육류가공업체로 현재에도 그 맥을 이어 존재하고 있다 한다.)으로부터 매탄항의 한 창고로 일본군에 의해 연행되어, 3000명 가량이 집단학살되는 장면을 목격했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은 샤관에 도착하여, 많은 난민을 발견한다. 2번째날 새벽에, 200명의 일본군이 와서, 몇 천 명의 난민중에서 2800여 명의 젊은이를 체포해 갔다. 일본군은 모두 4열 횡대로 서게 하여, 손목시계와 은화 등 귀중품을 제출하게 하고 몸을 수색하였다.

 

오후에, 우리를 매탄항으로 압송하여 창고 한칸에 감금하여, 일어나 앉아 있게 했다1). 3번째날 새벽, 일본군이 말하기를: "지금 현장으로 일을 하러 간다, 10명이 한 조로 나와라."고 하였다.  입구 부근에 서 있던 10 명이 곧 밀려 나갔고, 머지않아, 한 차례의 총소리가 났다. 곧, 문이 또 열리고, 다시 10 명이 밀려 나가고, 또 한 차례의 총소리가 났다. 나는 밖으로 나간 사람이 모두 총살당하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일본군은 3번째 조를 나오라고 했으며, 이 때 나도 나가게 되었다. 일본군이 우리를 호송해 갔다. 양쯔강가에 도착했을 때, 창고 뒤 강둑 위에 30여 명의 일본군이 받들어 총 자세로 배열해 있는 것을 보았고, 나는 곧 학살이 시작되려 한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내가 강 부근에 서자, 곧 바로 일본군이 받들어 총을 하여 사격을 하였고, 이 때 나는 강속으로 뛰어들어 헤엄을 쳐 몰래 반대편까지 가서, 강 인근의 한 기차속으로2) 숨어 들었다. 여기서 나는 10명 한 조씩 일본군에게 총살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 새벽에서 저녁 무렵까지 계속된 살인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6, 700 명이 총살당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일본군은 곧, 그들 모두를 하구로  끌고 가서, 기관총을 마구 쏘아 댔다. 날이 저문 후에, 일본군이 철수했고, 나는 강가로 와서 몰래 기슭으로 기어 올라 왔다. 그리곤 시체 사이에서 잠을 잤다. 

 

여기서 부터는 다른 인용원을 적용.(혼다 가츠이츠의 중국여행 p243)

 

몰래 물 속에서 나온 진덕귀씨는 근처에 있던 모포를 주워서 강옆의 시체 속에 섞여 누웠다. 이 시체들은 그와는 다른 장소에서 행해진 학살의 희생자들이었다. 시체 사이에서 자고 있으면, 그도 시체라고 여겨질 것이라 믿었다. 부두 위를 가끔 보초가 걷고 있는 소리가 났다.

 

다음날 이른 아침, 부두 위에 온 군인이 양쯔강의 수면에 떠 있는 시체들을 향해 수류탄을 던졌다. 아마도 시체를 확실하게 빨리 가라앉힐 수 있기에 그리했다고 진덕귀씨는 추정하고 있다. 그 군인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한 명의 일본군이 부두를 따라 내려와 교각 곁으로 왔다.

 

"아침의 추위로, 내 몸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양손으로 허벅다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 군인은 내 몸이 떨리고 있는 것을 알아 차렸는지 나를 소총으로 쏘았다. 허벅다리에 양손을 끼우고 있던 부분에 명중했다. 양 허벅지의 안쪽과 약손가락을 관통했다.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하지만 참고 움직이지 않았다."

 

한층 더 힘든 밤을 지새운 다음날 오후가 되자, 일본군은 '유지회'일동과 인부를 데리고 시체의 흔적을 찾으러 왔다. 인부들은 땅에 밀려 온 시체를 차례차례 옮기고 있었는데, 진덕귀씨 위에 접혀져 있는 세 구의 시체를 간신히 들어 내었다.

 

그의 차례가 되었다. 인부들이 들어 올리자마자 "아직 살아 있다!"고 놀라 소리쳤다. 유지회와 일본군도 그 사실을 알았고, "누구인가?" 라며 물어왔다. 주소를 말하자 '왜 여기에 왔는가?" 라고 수상히 여겼다. 난민지대로부터 연행되어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지만, 그 자신이 "시민"이라고 했으며, 노공들도 "이 사람은 분명 '일반시민'이다"라고 두둔해 주었기에 재차 살해당하는 일은 피할 수 있었다.

 

1)주; 일본군은 이곳에서 중국인들을 무릎을 땅에 대고, 서 있게 하였다고 한다. 이런 자세라면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2)주; 장개석군이 기차를 타고 황급히 피신할 때, 그 기차들이 강에 돌진했다고 한다. 여기서의 기차는 이 잔해이다.

 

   판카이밍(潘开明)의 증언

 

 일본군이 난징에 들어가기 전날, 나는 낮에 이발을 하고, 밤에는 인력거를 끌고 있었다. 일본군이 입성한 2번째 날, 그들은 우리집에 들이닥쳐, 나를 체포해 갔다. 3번째 날 오후 2시, 밧줄로 나를 묶어서, 300여 명의 사람들 속에 섞여, 샤관 매탄항에 도착했다.

 

대략 오후 4시가 되어, 매탄항에 도착하였는데, 그들은 모여있는 사람들 속으로 기관총을 발사했다. 내 눈앞에서 금꽃이 뿜어져 나왔고, 나는 기절하고 말았다. 이후, 나는 시체 아래에 눌려 있었고, 저녁 9, 10 시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머리를 들어 한 번 살펴보니, 몇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밧줄에 묶여 있는 사람도 있었고, 묵이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밧줄을 풀어준 후, 뿔뿔이 흩어졌다. 나는 철도를 따라, 기차 나루터까지 가서, 강가에서 몸에 묻은 피를 씻고, 근처의 인가로 들어가 필요한 옷 한 벌을 걸쳐 입었다. 2번째날 저녁에  도망쳐 비로소 고모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양정방(梁廷芳,량팅팡)의 증언

 

16일 정오가 되기 전, 돌연, 7~8명의 총을 가진 일본군들이 와서 자신들을 따라 오도록 지시했다. 화교초대소 뒤편의 공터에 도착하자, 수백명이 바닥에 앉아 있었다. 오후 5시경이 되니, 5000명 이상이 모였다. 일본군의 명령으로 네 명씩 일렬로 , 차례차례 샤관 방면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도착하니 벌써 6시가 지나 있었고, 우리는 중산부두 강가의 보도에 나란히 세워졌다. 우리들은 강을 건너 무언가 사역을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전대미문의 잔혹 비도한 대살육이었다.

 

신식 승용차가 왔고, 차에서 고급 사령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나왔다. 대검을 찬 사람들이 그에게 경례를 했다. 사령관이 무언가 한 두마디를 하고 흩어졌다. 동시에 도로 중앙에는 수십보 떨어진 위치에 기관총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약 10분 후에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시각은 오후 7시경. 그것이 대살육의 시작이었다. 살육은 밤 10시경까지 계속되었다.

 

곁에 있던 증영이 '살해당하는 것을 기다리느니 강에 뛰어들어 죽는 편이 낫다.' 라고 속삭였다. 나는 강에 빠져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물가가 수심이 얕아 허벅지 정도 밖에 차지 않아서 죽을 수 없지 않을까 하여, 수심이 깊은 곳으로 뛰어들어야 겠다고 결심했다.

 

일본군은 내가 강에 몸을 던진 뒤에도 가차없이, 기관총을 물에 난사했다. 나는 물속에 몸을 숙이고 있었지만, 갑자기 우측으로부터 총탄 한 발이 견갑골 뒤로부터 몸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류영흥(劉永興,려우용싱)의 증언

 

12월 14일 오후 3시쯤, 한 일본군이 문안으로 쳐들어와, 나와 남동생에게 손을 흔들어, 우리는 그들을 따라가게 되었다. 한 매국노 통역관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샤관 중산 부두로 운송하는 화물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우리집 근처의 30 여명의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우리는 먼저 한 광장으로 인솔되었고, 날이 채 저물기 전에, 공터위에는 많은 사람들로 가득 메워져 앉아 있었다. 일본군은 우리를 6명 내지 8명을 한 줄로 세워, 중산 부두로 가게 했다. 나와 남동생은 일반인 대열의 앞에 서서 갔는데,  가는 도중에, 우리는 길가에 적지 않은 남녀의 시체를 보았다.

 

샤관의 중산부두 강가에 도착하자, 일본군은 이미 수천 명을 체포해 온 상태였다. 일본군은 우리를 강 옆에 앉게 하고, 근처에서는 기관총을 가설해 세워 놓았다. 나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학살이 자행될 가능성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일본군 뒤쪽에 있는 사람들을 묶어 기관총으로 바깥쪽을 잇달아 쏘기 시작했고, 강 속에 수류탄을 던져 넣었다. 

 

강으로 뛰어가는 사람은  일부는 폭격으로 죽었으며, 어떤 사람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터져 버렸고, 처참한 비명소리, 큰소리로 통곡하는 소리가 한조각을 이루어 울려 퍼졌다.  저녁이 되자, 일본군은 강옆에서 야경을 하고, 강가에 둥둥 떠있는 시체가 눈에 띄면, 총검을 사용해 제멋대로 찔러댔다. 나는 비교적 기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총검이 닿지 않아, 겨우 죽음의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천 광 셔우(陳光秀)의 증언,女

 

나는 쟝닝(江寧)의 탕산전(湯山鎭)에 있는 쉬샹춘(許巷村)에서 태어났다. 1937년 12월에, 일본군 선봉부대가 우리집 거주지 근처 도로를 따라 난징을 공격하였다. 음력  11월의 초여드레, 우리 아버지 진지송은 집에 남아 집을 보셨고, 일본 통신병이 도로를 따라 전선을 회수하고 있었다. 마침 우리 아버지께서 탈곡장까지 올라가 풀을 운반하여 소를 먹이고 계시다, 일본군에게 총을 맞아 돌아가셨다.

 

같은 달 14일, 마을에 갑자기 수 많은 일본군이 나타났다. 당시에는 온 마을에 약 200명의 주민이 있었는데, 일본군은 마을의 젊은이 100 여명을, 탈곡장 위에 모아 놓고,  모두를 마음대로, 총검으로 한 명씩 찔러 죽였다. 내 남동생 천광둥도 그 속에 있었다. 당시에 다린이라 불리는사람이 있었는데,  일본군이 재검사 할 때, 그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고,  칼로 몇 번을 다시 찔렸다. 칼을 한번 찌를 때마다 다른 외침이 들렸는데,  “우리 어머니” 하고 외치는 소리도 들렸다. 이런 식으로, 참사당했다.

 

일본군의 잔인성은, 살인, 방화, 강간, 약탈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짓이 없었다. 당시 춘상아이 가문의 아이훙 라이, 아이건라이, 아이이성, 아이런이 4형제는, 일본군에게 붙잡혀, 마치 마대를 던지는 것처럼, 산채로 땅에 던져져 압사했다.

 

또한, 일부 외지에서는 일본군에 붙잡혀 막일꾼이 된 사람도 있었고, 죽은 후에도 일본군이 총검으로 심장, 간, 오장을 전부 파내었다. 이웃마을 팡씨의 둘째 아이가 있었는데, 일본군에 의해 두 도막이 나서, 한 도막은  언덕의 큰 공터에, 한 도막은 6묘( 논의 단위) 입구에 던져졌다. 이런 일본군의 만행은 려우씨 다섯째 아들에게도 계속되어, 일본군은 충먼안에 들어와, 칼로 그의 머리를 베었으며, 육신의 반토막은 문 바깥에, 반은 문 안에 던져졌다.

 

일본군은 살인이외에도, 많은 여성을 유린하였다. 수런파의 아내는 당년 40세 가량 되었는데, 우리집 침상위에서 일본군에 깔려 강간되었다. 수런파 가문엔 민며느리가 있었다. 그녀는 이제 막 15,6살이 되었는데, 일본군 서너 명이 웨이 관 집안으로 끌고가 윤간하였다. 하복부가 붉게 부어올라 피가 그치지 않았으므로 길을 걷기가 곤란하였다. 

 

일본군이 쉬샹춘 범죄행위를 피로 씻어 내도, 좀처럼 잊기는 쉽지 않다. 우리집 부친, 남동생이 살해 당한 것을 제외하고서도, 작은 어머니가 일본군을 피하여, 외지인 다산에서 어린 아이를 낳아, 산후 풍병에 걸렸고, 오래지 않아 돌아가셨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아들이 살해 당하신 일로,  당신 또한 근심걱정으로 지새우다 돌아가셨다. 우리 일가는 우리 세 자매와 처조카 두 명만이 남게 되었다.

   

루위화(陸玉華)의 증언, 女

 

1937년, 우리집은 중산릉에 있었다. 우리집 식구는, 62세의 아버지 루 송 린, 49세의 어머니 루주, 맏아들 루퉁싱, 첫째 숙모 상메이화, 둘째 오빠 루순바오, 첮째 동생 루순샹, 작은 동생 루사오우와 나, 이렇게 8명이 있었다.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기 전,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갔다. 나는 큰 오빠, 숙모를 따라 화이안현으로 피난을 떠났고, 어머니는 두 동생을 데리고 심양 쥐런항 난민지역으로 피난하셨다. 아버지는 집을 포기하지 못하시고, 집을 지키기 위해 남아 계셨다.

 

일본군이 성으로 들어가 중산릉을 지나갈 때, 아버지께서는 집 입구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총살당하셨다. 어머니께서는 난민지역에서, 아버지께서 살해 당했다는 말을 들으시고, 외삼촌과 서둘러 집으로 돌아 가, 꼭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하여 안장하겠다고 생각하셨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군에게 발견되었고, 강간되어 이로 인해 정신병에 걸려, 한을 품고 돌아가셨다.

 

나의 둘째 오빠와 3명의 동생들도 일본군에 붙잡혀 총살당하였다. 일본군은 우리 일가 4명을 죽였으며, 우리가족 모두에게 고통을 초래하였다. 이 원한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당시, 우리집은 생존자가 있었으니, 이만하면 양호한 편이었다. 우리집 한 이웃의  6,7명은 일본 군용 휘발유에 산채로 타 죽었다. 정말 잔인한 일이었다. 

   

사오 한 전(邵翰珍)의 증언, 女

 

 일본군이 1937년 난징을 점령했을 때, 나는 마췬칭마에 있는 집에 있었다. 나의 아버지 사오진칭, 할아버지인 사오차이차오, 외삼촌은 런파허, 이분들 모두가 일본군에 의해 총살당했다. 일본군은 우리 마을에 들어 와, 곳곳에서 살인을 하고 불을 질렀으며, 마주치는 사람은 붙잡아 살해했다. 우리는 여기저기로 피난하였고, 밤이 되서도 감히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리수영(리슈나웨이, 李秀英)의 증언

 

난징대학살 당시 임신 7개월이었던 리수영은 일본군이 휘두른 총검에 37차례나 찔리는 부상을 입었으나, 미국인 의사 로버트 윌슨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리 할머니의 모습은 당시 난징대학살을 기록한 존 마기 목사의 필름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일부 서방 목격자들의 일기와 편지에도 언급됐다.

 

1947년, 리수영은 난징 군사 법정에서 난징대학살의 주범인 곡수부(구서우푸)사건의 증인으로 법정에 나가 증언을 하였으며.  일본의 평화 집회에도 참가하여 일본군의 폭행사실을 고발하는 등, 난징대학살의 진실을 알리는데 몸을 아끼지 않았다.

 

1998년, 일본의 우익 작가 마츠무라 도시오가 쓴 ' 난징대학살에 대한 대(大)의문'이란 책을 전전사에서 출판하였는데, 이 책에는 리수영을 난징대학살을 날조한 인물로 모독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본 우익 세력의 공격과 비방에 맞서, 1999년, 리수영은 일본 도쿄 지방 법원에 마츠무라 도시오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하여, 1심과 2심에서 승소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최종 재판을 앞두고 2004년 12월 4일 6시 10분에 고루병원에서 사망하였다. 향년 86세였다. 다음은 리수영 할머니의 증언이다.

 

당시 19살이었으며, 배에는 7개월된 아이가 있었다. 1937년 12월 18일, 일본군이 많은 남성들을 연행해 갔다. 이틀쯤 지나 오전중에, 일본병사가 왔다. 나를 데려 가려 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버티었다.

 

벽에 머리를 부딪혀 오른쪽 머리에서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정신이 혼미해 쓰러졌다.  아버지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다행히도 정신이 들었다.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니, 머리는 짧게 잘려져 있었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일본인들에게 능욕을 당할 수는 없었다.

 

나는 군용 침대에 누워 있었다. 방에는 수십 명의 여자가 있었다. 점심식사가 끝나자 세 명의 일본군이 와서 실내에 있던 남자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 중 두 명의 일본군은 각자 한 명씩 여자 두 명을 끌고 갔다. 남은 한 명이 허리에서 총검을 빼어 내 치파오(중국의 전통의상)의 단추를 끄르려 했다.

 

누워 있었지만 , 기회를 봐서 칼을 빼앗으려 마음먹고, 일본군이 일어나는 틈을 타 , 허리의 총검 아래부분을 잡기는 했으나 뽑아 낼 수는 없었다. 일본군이 나의 팔을 잡아 눌렀다. 나는 머리를 들이 받고, 그녀석의 손을 물었다. 한 손은 일본군의 옷을 쥐어 잡고, 둘이서 엉켜 붙게 되었다. 그 때는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그러자 두 명의 일본군이 총검을 뽑아 내 몸을 사정없이 찌르기 시작했다. 화가 치밀어 오르고 있어서인지, 전혀 감각이 없었다. 얼굴을 비롯해, 귀, 코, 눈, 입, 다리등을 사정없이 찔렸다. 나는 이를 악물었고, 어쩐지 아무리 찔려도 감각이 없었다. 허벅지를 제일 많이 찔렸다. 피투성이가 되었다. 입속의 피가 흘러넘쳐, 그것을 일본병에게 토해 냈다. 그 후 , 배를 찔려 넘어진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께서 "슈나웨이, 슈나웨이!" 외치고 있었고, 한쪽에는 여러 사람들이 보였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여, 벌써 시체를 묻을 땅을 파서 묻으러 가는 중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새로 숨을 들이 마셨다. 입안의 피가 쿨럭거렸다. 나는 완전히 의식이 돌아왔으며, 아이는 유산되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살아 돌아간 것을 알고, 곧바로 고루병원에 데려갔다. 미국인 의사가 상처를 꼬매 주었다. 전부 37곳이라고 했다.

 

그 때 머리카락은 피로 뒤엉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입술의 일부가 찢겨 나갔고, 이빨은 모두 빠져 있었다. 수술을 할 때  미국인이 사진과 영화를 찍었고, 도쿄 전범재판에서 이 영화가 방영됐다.

   

마핑피우

 

도망을 가는데 주위에 온통 죽은 사람들이었다. 큰 길, 작은 길 모두 시체였다. 일본군들은 길을 따라 가면서 기관총을 쐈다. 어떤 사람인지 상관하지 않고 무조건 사람만 보면 그냥 총을 쐈다.

  

샤수친

 

동생을 데리고 엄마를 찾으러 갔다. 밖에 나가니 엄마가 죽어 있었다. 아무리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았고 옷은 다 벗겨져 있었다. 그 때를 생각하면 정말 고통스럽다. 어떤 때는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마음을 칼로 찌르는 것 같아 생각만 해도 슬프다.

  

우구워쯔 (당시 중국군)

 

 그 때 우린 난민구역에 모여 앉아있었다. 일본군이 열 사람씩 불러 한 줄로 벽쪽에 세워놓고 총으로 쏴 죽였다. 일본군들은 난민구역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중국군이라고 말했다.

  

지앙근푸

 

 남동생이 죽어 엄마가 동생시체를 안으려고 했다. 그 때 옆에 총을 들고 있던 일본군이 엄마에게 총 두 발을 쐈다.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중에서 가장 참혹했던
난징대학살 관련 사진을 올리기 전에 진상을
알리고자 스크랩해온 글입니다.

다만, 여타의 내용은 제외하고 증언으로만
재구성했음을 밝히는 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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