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기록사진실

난징 대학살의 개요

zzixxa 2009. 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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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여름 루거우차오(盧溝橋)사건으로 중일전쟁의 단추를 연 일본군은 파죽의 기세로 텐진(天津), 베이징(北京) 등을 거쳐 11월 상하이(上海)를 성공적으로 점령하였다. 그들의 다음목표는 장제스(裝介石)국민당정부가 수도로 삼고 있던 난징(南京)이었다.

9만명의 일본군이 양쯔(陽子)강 남안(南岸)의 이 도시를 3면으로 포위해 들어가자 총통 장제스는 성 함락 5일전 정부를 이끌고 충칭(重慶)으로 퇴각했다. 잔류해 있던 난징 시민과 군인들은 12월 13일 새벽, 성벽을 타고 넘어온 일본군들을 앉아서 맞았다.

난징포위전 3일만에 난징은 일본군에 함락되었고, 12월 13일부터 6주간에 걸쳐 일본군은 중국군과 일반시민을 학살하였다.

가장 피해가 심했던 곳은 일본군의 침입을 피해 난징시를 탈출하기위해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집중되었던 양쯔

강이었다. 중국측의 주장으로 이곳에서만 10만 명이 넘는 중국군과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강물은 피로 물들었고, 시체가 산을 이루었으며, 어떤 이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양쯔강에 뛰어들어 익사하기도 하였다.

학살은 기총(機銃)에 의한 무차별 사격과 생매장, 또는 휘발유를 뿌려서 불태워 죽이는 등 극히 잔학한 방법으로 자행되었다. 또한 부녀자에 대한 강간과 약탈·방화(시내의 약 1/3이 소실됨)도 횡행하였다.

이 학살로 인해 30만 명가량의 중국인이 학살되었으며, 중·일 역사 속 그늘에만 묻혀있던 난징대학살은 아이리스 장의 저서,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을 통해 세계에 재조명되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즉시 일본내에서는 출판되지도 않은 이 책을 쓴 아이리스 장을 마녀로 비유하며, 난징대학살을 20세기 최대의 거짓말로 규정하였다. 아이리스 장(Iris Chang) 은 이 책을 쓴지 7년 뒤인 2004년 11월 10일(중국시간), 신경쇠약에 시달려 오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한 고속도로변 자신의 차 속에서 머리에 총을 쏴 숨진채 발견되었다. (당시 나이 36세) 



"아이리스의 책은 극악한 가짜사진을 사용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미국인들을 속이고 있다."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은 일본내 남경대학살 부정파와 인정파의 새로운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마쓰이 이와네(가운데)

하지만, 난징대학살 당시 난징에 체류하였던, 외국인들과 참전 일본군에 의해 이 학살장면은 사진으로 기록되었으며, 뉴욕타임즈등의 서구언론에 생생하게 보도되었다.

또한, 학살당시 살아남은 사람들과 학살에 참여한 일본군인들의 증언을 비롯해 수기, 일기등이 그 잔학상을 증명하고 있으며, 학살장소에서 수많은 유골이 발굴돼, 당시 난징의 지옥과도 같은 대학살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굳어져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뒤의 극동군사재판에서 당시의 총사령관인 '마쓰이 이와네'가 이 대학살의 책임자로서 사형에 처해졌다.

또 당시의 일본군 제6사단장 다니 히사오(谷壽夫) 중장을 포함한 여러 명이 난징의 법정에서 전쟁범죄자로서 사형되었다. 

형장으로 압송되는 다니 히사오

남경전 중일 전투 경과 일지

1937년 7월 일본은 노구교(盧溝橋)사변을 빌미로 중일 전쟁을 시작했다.

먼저 천진을 점령한 일본은 이어서 계속 남하하기 시작하였고, 3개월만인 그해 11월 12일 상하이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한 후에, 8개의 사단, 2개의 여단 및 해군의 1부, 총 인원 20만 명의 규모로, 남북 두 방향으로 나눠 난징을 연합 공격했다.

북쪽으로는 상하이파견군<제 3, 9, 11,13, 16사단, 제 101시게토 지대(重藤支隊), 야전중포병 제 5여단>을. 남쪽으로는 제10군 <(제6, 18, 114사단 및  쿠니사키지대(國崎支隊), 야전중포병 제 6여단>을 투입했다.

http://members.at.infoseek.co.jp/NankingMassacre/sougou/sosikizu/G_tyusina.htm
(참조 :중지나 방면 일본군 편성표)

중국수비군은 타이후 호(太湖) 북쪽 주랑(走廊)에 좌군(제15군, 제19군, 제21군을 관리)이 , 우군(제8군, 제10군, 제23군을 관리)은 타이후, 난징, 항저우의 수도 방어를 맡았다.

  • 11월 13일, 일본군은 남북 두 방향으로 동시에 공격을 개시하고, 그날 밤, 중국 좌익군은 복산(福山), 쑤저우 방위선 진지까지 후퇴하고, 양측은 창서우(常熟), 싱룽(興隆), 복산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 11월 19일, 상숙(창서우,常熟), 쑤저우(蘇州), 자싱(嘉興)이 연달아 함락되고, 우푸(吳福)전선이 무너져, 중국 군대는 시청시앤(錫澄線)까지 후퇴했다.

  • 11월 20일, 난징에 있던 국민당 장개석 정부는 충칭(重慶)으로의 천도를 선포하고, 남경수비사령부를 설립했다.

  • 11월 24일 당생지(唐生智, 탕성즈)가 남경수비사령관으로 임명되며, 총 병력 11만 여명을 소집하여, 난징을 방어에 임다.

    그 부대 배치는 제72군의 88사단은 수서문(水西門), 중화문(中华門), 무정문(武定門), 우화대(雨花台)의 수비를 맡고, 제78군의 36사단은 현무문(玄武門), 홍산(红山), 막부산(幕府山, 무푸산), 읍강문(挹江門)의 수비를 맡았다.

    본대가 광화문(光華門), 중산문(中山門), 태평문(太平門), 자금산(紫金山, 쯔진산), 기린문(麒麟門) 및 천보성(天堡城)까지 수비를 맡도록 지시하고, 별도로 일부의 수비대를 우룽산(乌龙山) 요새로 파견했다.

    제71군의 87사단은 통제문(通濟門)과 광화문(光華門) 일대를, 헌병대는 정회문(定淮門), 한중문(漢中門)과 청량산(清凉山)을 맡아 방어하였다.

    이러던 중, 상하이에서 난징까지 후퇴한 부대가 급히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제74군은 우수산(牛首山)에서 순화(淳化)까지 , 제66, 제83군은 탕산(唐山) 동쪽과 서쪽 양측에 배치되었다.

  • 11월 27일, 무석(無錫, 우시)이 함락되며, 12월 1일 장인(江隂)이 함락된다. 타이후 호 남쪽에 있던, 일본군은 11월 28일에 오흥(吳興)을 점령하였고, 시쳉쉬안(錫澄線)까지 공격을 받아 무너졌다.

  • 12월 6일, 일본군은 이미 서하산(栖霞山), 탕산(湯山), 순화(淳化,춘화), 말릉(慕陵, 모링)에 이르러, 이 일대 외곽에 진지를 구축했다.

  • 12월 9일 오전, 일본군이 총공격을 개시하고, 제16사단이 기린문(麒麟門, 치린먼)을 공격하여 점령한 후, 제9사단과 1부가 합쳐, 효릉문(孝陵門, 샤오링먼)을 공격했다

    제6사단이 우수산(牛首山, 녀우셔우산)을 점령한 후, 주력은 중화문(中華門)을 향해 진격했다.
    제9사단이 비행장을 점령한 후에, 광화문(光華門), 통제문(通濟門), 중화문으로 진격했다.

  • 12월10일 새벽3시에 일본군은 남경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재차 남경의 수비대에 투항을 권유하나 항복하지 않자 드디어 12시에 난징 총공격 명령을 내린다. 본군은 난징 성곽 및 우화대(雨花台), 쯔진산(紫金山) 등의 외곽을 공격하여, 중국 방위군 제88사단의 여단장 주츠(朱赤), 고치숭(高致嵩), 제87사단의 여단장 이안화(易安華)가 전사했다.

  • 12월12일 오후, 우화대, 쯔진산 등 요점이 연달아 함락되고, 일본군이 중화문(中華門), 광화문(光華門), 중산문(中山門)에 돌입하며, 중국 방위군과 일본군의 시가전이 시작된다. 이 때에, 일본 함대는 이미 우룽산(烏龍山) 강 수면에 도착하고, 쿠니사키지대는 샤허시엔(下和縣)을 공격하여 포구(浦口)를 향해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남경수비대장 탕성즈(唐生智)는 장개석의 명령을 받아 “본대는 포위망을 뚫고, 일부는 양쯔강을 건너 탈출하라.”는 지시를 수비대에 내린다. 이 명령으로 인해 중국군은 가장 중요한 도시전투에서 조직적인 저항도 하지 못했으며 동시에 안전한 후퇴도 하지 못하는 최악의 결과를 가져와, 결국 대부분이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집단처형을 당하였다.

  •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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