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기록사진실

[난징대학살] 살인게임으로 신문에 실린 두 하급장교

zzixxa 2009. 4. 27.
반응형

난징전 당시 일본에서는 대륙으로 전쟁을 하러 간 일본군의 승전보가 일본의 자긍심이 되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이 무렵 일본신문은 전쟁에 관한 기사로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목 베기 시합에 관한 것으로, 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살인을 부추겼다.

이러한 목 베기 경쟁중 하나를 남경의 자금산 기슭에서 찾아볼 수 있고, 이에 대한 기록 또한 주요신문에 실려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쿠융에 주둔하던 카타기리 부대의 두 장교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노다 다케시(野田毅)소위는 무석(無錫,우시)을 출발한 이후, 100인 목 베기 경쟁을 시작했다.

이 두 하급장교는 그들에게 용장(勇將)이라는 호칭을 받음으로써 가장 강한 사무라이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을 나타낸 데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상관은 격려했고 살인시합을 허가해 줬다. 누가 먼저 남경을 점령하기 전에 100명을 죽이고 영광을 차지할 것인가라는 것이 경쟁의 목표였다.

그들이 쥐룽(句容)입성 직전까지, 무카이도시아키는 89명을, 노다다케시는 78명을 죽였다. 그들의 목표인 100명은 실패했지만 경쟁은 멈추지 않았다. 비록 두 장교 모두 목표를 채우진 못했지만 그들의 상관은 그들의 노고를 저버리지 않았다. 상관은 여러 차례 격려하고 포상했고 그들의 분투를 뒷받침했다. 오사카의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 과 도쿄의 니치니치신문(東京日日新聞)과 일본광고지(영문판)는 이 살인경쟁을 마치 스포츠 중계하듯 기사화했다.

난징대학살 기념관의 100인 목 베기 경쟁을 벌인 두 소위의 실물크기 사진판


무카이도시아키와 노다다케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들의 명예가 수그러드는 것을 원치 않았고, 남경함락 후 자금산 기슭에서 두 명의 장교는 경쟁을 계속 이어 갔다. 이미 무카이 도시아키는 106명을 노다 다케시는 105명을 죽였지만 누가 먼저 100명을 기록했는지 알지 못했다.

무카이 토시아키 소위 1948년 처형 당시 36세 / 노다 타케시 소위 1948년 처형 당시 35세


둘 다 목표는 넘어섰지만 누가 먼저 달성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경쟁을 '친선게임'으로 생각했고, 무카이도시아키는 '재미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시점에서 승자를 가리지 못하자 두 장교는 150명으로 목표를 바꾸거나 1000명을 목표로 하는 큰 계획을 생각했다. 계획을 수정한 후 두장교는 경쟁에서의 즐거움을 계속해 느꼈다. "어느 기록에 의하면 무카이도시아키는 250명을 죽여 노다다케시를 크게 앞질렀다. 그래서 노다다케시는 1000명을 목표로 하는 경쟁을 무카이에게 제안했다." (자료 :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1938년 2월 9일자)고 한다.

중국에서는 1946년 도쿄 전범재판에 검찰과 법관을 파견했는데 그때 이 기사가 발견돼, 증거로 채택되었으며, 두 사람은 1948년 남경 양화대에서 중국 측에 의해 총살당했다

일본 신문 내용을 보고 싶으시면 더보기 를 클릭하세요.

 


 

일본 측과 두 사람의 장교는 자신들은
그런 일을 벌인 적이 없다고 끝까지
부인했습니다.

진실은... 글쎄요.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