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부부 대등한 관계였다
자네 항상 내게 이르되,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가?
1586년 30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레 요절한 남편을 비통해하는 부인의 애절한 심경뿐 아니라 16세기 조선시대 부부 간 호칭과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황문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조선시대 언간(순한글 편지) 자료의 부부 간 호칭과 화계(話階·청자를 대우하는 등급)’를 분석한 결과 조선시대 남편과 아내는 서로 대등한 호칭을 사용하는, 존중하고 조심하는 관계였다고 2일 발간된 한중연 반년간 학술지 ‘장서각’에서 주장했다.
황 교수는 현재까지 존재하는 16∼19세기 조선시대 편지글들을 살펴보면 남편은 아내를 ‘자내, 게, 게셔, 마누라’로, 아내 역시 남편을 ‘자내, 게셔, 나으리’로 부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남편이 아내를 ‘자내’(오늘날 ‘자네’)라고 호칭한 경우는 16∼17세기 편지에서 주로 등장하는데 16세기에는 ‘하소’, ‘하소서’ 등의 종결형과 주로 사용됐고,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하옵소’나 ‘하압’(‘하소’+자신을 낮추는 ‘삽’)체와 공존했다.
특히 이때 ‘자내’ 앞에는 한두 자 여백을 통해 존대를 표시하는 격간법(隔間法)이 사용돼 16세기보다 아내에 대한 대우가 격상됐음을 보여준다.
16세기 이응태 묘에서 출토된 부인의 편지에서도 ‘자내’라는 호칭은 하소체와 결합돼 있어 이 무렵 부부 간에는 대등한 호칭과 화계가 사용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황 교수는 주장했다. 그러나 17∼18세기 와서는 남편은 아내에게 ‘하옵소’체를, 아내는 남편에게 ‘하압’체를 사용한 사례도 일부 발견돼 차등적인 화계를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18세기 이후 남편은 아내에게 ‘자네’ 대신 ‘그대’를 의미하는 ‘게’, ‘게셔’ 등을 주로 사용했다. 추사 김정희가 1840년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는 “천안서 그대(게셔) 모양을 보니 그렇지 아니할 것 아니오나 그대가 그리하여 큰 병이 나시면 말이 되겠습니까”란 대목이 나온다. 밀양 박씨(1700∼37)는 남편에게 “그대(게셔) 오셔도 근심을 많이 하시기에 잠깐이라도 근심을 덜어 드리옵자”라고 했다.
황 교수는 배우자를 ‘게셔’로 호칭한 남편과 아내는 모두 종결체로 ‘하압’류를 사용해 서로 대등한 호칭과 화계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황 교수는 왕실 여성을 일컫던 ‘마누라’라는 용어가 19세기 후반 사대부 언간에서도 사용된 예를 처음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1882년 부인에게 “그간 망극지사를 어찌 만 리 밖에서 간단한 편지로 다 말하오리이까. 마누라께서는 상천(上天)이 도우셔서 환위를 하셨거니와 내 어찌 살아 돌아가길 바라겠습니까”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 무렵 아내는 벼슬하는 남편을 호칭할 때 1894년 오정선의 아내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발견되는 ‘나으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황 교수는 “요즘엔 시어에만 사용되는 그대란 표현이 18세기엔 남편, 아내 모두 상대방을 지칭할 때 사용했다는 점이 흥미롭다”면서 “호칭이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존경심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오늘날 부부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