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중 처용가에 나오는 처용이 서역인인 이유
9세기 울산항엔 곳곳 아랍상인들 조선 초 <악학궤범>에 있는 처용상
<삼국유사>에 나오는 ‘처용가’다. 주인공 처용은 역신이 미모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을 보고도 이런 노래를 부르면서 물러간다.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인 처용무의 5인 무희 복장 헌강왕이 놀며 거닌 곳이 개운포를 포함한 동쪽 지방이고, 왕의 어전에 나타나 노래하고 춤을 춘 인물(자연이건 용자건)들이 신라인들이 그때까지 보지 못한 생소한 대상들이며, 처용의 용모와 설화의 내용이 이색적이라는 데서는 두 문헌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사기>에는 처용의 이름이, <…유사>에는 그의 출현연대가 없고, <…사기>에는 역신이나 처용가, 왕정 보좌 같은 내용이 없으며, 출현자 수에서 <…사기>는 4명이나 <…유사>는 7명으로 나오는 등의 다른 점들이 있다. 두 문헌 내용을 비교할 때 우리는 ‘사기’의 내용이 어떻게 설화로 가공·윤색되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인공인 처용이 생면부지라서 ‘영물’로 오해된 것뿐이지, 사실은 자연인이며 외래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을 방증하는 사료들을 고려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유사>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사간대부로 있다가 울주에 귀양살이를 간 정포는 <동국여지승람>에서 처용이 개운포의 푸른 바다에서 나타났다는 현지 전문을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지리서로서는 가장 오래된 <경상도지리지>에도 울산 남쪽으로 37리 떨어진 개운포에 처용암이 있는데, 신라 때 그곳에서 모양이 기괴한 처용옹이란 사람이 출현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직설적 처용가도 아랍영향 이러한 문헌 기록과 더불어 처용의 외인상을 말해 주는 증거의 다른 하나는 그가 지었다고 하는 처용가의 내용이 이색적이라는 점이다. 고전 연구가들에 따르면 신라 향가는 일반적으로 그 표현방법이 굴절되고, 내면적이며 형상성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그런데 보다시피 처용가는 이와는 달리 감정 표현이 솔직하고 대담하며 직설적이다. 이러한 경향은 중세 페르시아나 아랍 문학에서 쉬 발견된다. 물론 이역간의 문학작품에서 어떤 공통적인 경향이나 요소가 포착되었다고 하여 그것을 무턱대고 상관성의 소산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이며 논리의 비약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공통성은 어떤 매체나 교류, 특히 주역의 이동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음도 부정할 수는 없다. 이상에서 우리는 처용이 결코 용 같은 영물이나 내국인이 아니라, 동해로부터 울산에 상륙한 처음 보는 외래인이라는 추단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온 외래인일까? 그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처용이 출현한 개운포가 어떤 곳이며, 그러한 곳에 나타날 수 있는 외래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문헌 기록과 유물에 따르면, 울산은 수도 경주를 배후에 둔(약 40km정도 떨어져 있다) 산업(철 생산 등)과 상업(경상도 66개 고을 중 유일하게 장사를 좋아하는 고을로 기록)의 중심지였다. 게다가 천연적인 양항과 내륙교통 요지로서의 조건도 두루 갖춘, 명실상부한 국제무역항이었다. 외래문물 다듬으면 우리것 그렇다면 이 국제무역항을 통해 선을 보인 외래인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그들은 아랍-무슬림들을 비롯한 서역인들 이었을 것이다. 당시 남해를 통한 동서교역의 주역을 맡은 아랍-무슬림들이 신라에 내왕하고 정착까지 했다는 중세 아랍문헌의 기록과 신라 고지에서 서역인상의 무인석이나 토용 같은 유물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처용보다 200여 년 전에 토화라(현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일본에 표착했다는 일본쪽 기록으로 봐서도 서역인들이 일찍부터 동방에 왔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까지 이러한 사실들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것이 처용의 자연인, 외래인 상을 의심하거나 부정하게 했던 주요인이었다. 지금 해마다 울산에서는 ‘처용문화제’를 열어 처용을 기리는 문화 한마당을 흥겹게 펼치고 있다. 자칫 그 원형적인 주인공이 외래인이라고 해서 탐탁찮게 여길 수도 있는데, 이것은 한낱 단견이고 기우이며 닫힘이다. 전승을 포함해 모든 문화현상은 어디서 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슬기롭게 받아들여 제 것으로 만들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건국신화들을 비롯해 우리네 많은 문화전통 중에는 그 뿌리에 외래적인 요소가 적잖게 묻어있다. 처용 실화가 오랫동안의 변이과정 끝에 전승으로 굳어져서 오늘로 이어진 경우가 그러하다. 이것이 바로 문명의 만남이고 수용이며 열림이다. 울산 남구에 있는 처용암과 청용가비 정수일 교수 |